비판적 지성의 표본

리영희(李泳禧 : 1929~ 2010)는 진보적 사상가이자 언론인으로서 1970년대와 80년대 젊은이들 사이에서 ‘사상(思想)의 은사(恩師)’라고 추앙받던 사표였다. 그는 1929년 평안북도 운산군 북진면에서 태어났다. 그는 단신으로 월남해서 전액 국비가 지원되는 국립한국해양대를 졸업하고 6·25가 터지자 육군에 입대하여 유엔군 통역장교로 7년간 근무하다가 소령으로 예편했다. 1957년부터 합동통신 외신부에서 기자 생활을 시작했는데 ‘워싱턴 포스트’에 이승만 독재에 대한 기사를 익명으로 기고하거나 미국의 진보적 평론지 ‘뉴 리퍼블릭’에 기고도 했다.
언론인으로서의 리영희의 삶은 순탄치 못했다. 그는 조선일보에 근무하던 1960년대에 베트남전쟁과 한국군 파병에 대한 비판을 하다가 1968년 조선일보에서 쫓겨났다. 1970년에는 합동통신 외신부장으로 있었으나 ‘64인 지식인 선언’에 가담한 탓에 다시 해직되었다. 1972년에는 한양대학에서 교편을 잡았으나 1974년 ‘민주회복국민회의’에 가담한 탓에 교수재임용법에 의해 1976년 강제 해직 당했다. 리영희가 비판적 지식인이 된 데는 군 장교 생활을 하면서 거창 양민 학살사건이 자신이 속한 부대가 자행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부터였다. 또한 그는 국군 고위간부들의 부정부패와 식민지 정책에 버금가는 미국의 한반도 정책에 분노하면서 군부 독재와 미국 중심의 세계질서에 날카로운 비판의 면도날을 들이댔다.
리영희는 비판적 보도와 연구 활동, 민주화운동 참여 때문에 4번 해직, 9번 연행, 5번 구속 되는 등 필화가 끊이지 않았다. 리영희는 ‘공산주의자’로 조작되고, 그의 거의 모든 책은 금서로 묶였다. 1980년에는 광주민중항쟁의 ‘배후 조종자’의 한 사람으로 구속되기도 했다. 그런 탓에 그의 살림살이는 말이 아니었다. 아내와 가족에게 너무 많은 고생을 시켰기 때문에 그는 책도 마음대로 사서 볼 수가 없었다. 리영희는 타계하기 전 마지막 가진 MBC 라디오 ‘손석희 시선집중’인터뷰에서 어려운 생계에서도 독서에 매진한 추억담을 이렇게 회고 했다.
“재미난 것이 원고료 좀 들어오면 서점에 가서 신간들 못 본 것 꾸려 가지고 집에 들어오는데, 와서 대문 밖에 책 꾸러미 놓고 대문 두들겨서 집에 일단 들어가요. 아무렇지 않게 들어가서 나와서 책 꾸러미를 다시 가지고 들어가요. 보면 집 사람, 어머니가 ‘식구들 (생계는)어떡하는데 책만 사온다’고. 그런 수법으로 하면서까지 독서를 많이 했죠.”
리영희는 골프, 화투, 바둑 같은 잡기는 아무 것도 할 줄을 모르고 무지하게 책을 읽고 공부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분초를 아껴가면서 책을 읽고 공부하고 글을 썼다. 그는 영어 일어는 물론 중국어와 프랑스어에도 통탈한 탓에 구하는 자료의 폭이 넓었으며 그래서 세계정세의 풍향에 예민할 수 있었다. 더구나 그는 ‘워싱턴포스트’의 통신원이었던 까닭에 사람들이 ‘미국 CIA의 첩자가 아닌가’라는 오해를 살 정도로 극비 문서들에 접근할 기회가 많았다. 그는 진보적 성향의 정부가 들어선 이후에도 공직에 나아가지 않았으며 권력 비판을 멈추지도 않았다. 한마디로 그는 비판적 지성의 표본이었다. 그는 여러 조사에서 광복 이후 가장 영향력 있는 지식인으로 선정됐으며, 지식인의 현실 참여에서 언제나 최전선에 서 있었다. 이 땅에서 펜이 칼보다 강하다는 것을 리영희만큼 생생히 보여준 지식인은 없다.

저작권자 © 중소기업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