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두려움 그 자체 뿐

1933년 3월4일, 제32대 미국 대통령 취임식이 워싱턴 국회의사당에서 열렸다. 이날의 주인공은 선거인수 472대 59라는 압도적 표차로 현직 대통령 후버를 누르고 승리한 프랭클린 루스벨트였다. 당시 미국은 1929년 10월에 몰아닥친 대공황의 여파로 국민들을 무기력과 절망에 빠져있었다. 1930년에 400만이던 실업자가 1931년 800만, 1932년 1200만, 1933년 1500만 명으로 급격하게 늘어났고, 1932년 한 해 동안 뉴욕에서만 95명이 굶어죽었다.
대통령 루스벨트에게 주어진 시대적 소명은 대공황 탈출이었다. 그는 전국에 중계되는 라디오 연설에서 경제공황을 타개하기 위한 ‘뉴딜(New Deal) 정책’을 선언했다. 그는 이 연설에서 미국 국민들에게 두려움을 버리고 자신을 믿고 따라 줄 것을 요구했다. 그는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두려움 그 자체 뿐”이라며 자신감 회복이 급선무임을 강조했다.
뉴딜 정책은 케인스 이론을 활용한 자본주의의 국가규제 정책이었다. 루스벨트는 특별의회를 소집해서 같은 해 6월 16일까지 100일 동안, ‘백일의회(百日議會)’라고 불리는 특별회기 동안 뉴딜 정책을 추진하는 데 필요한 정부 법안을 입법화했다. 한마디로 뉴딜정책은 국가와 대통령의 권한확대를 통해 대공황으로 마비상태에 빠진 미국 사회와 경제를 재건하는 급진적 정책이었다.
루스벨트가 위기를 극복한 과정은 아주 드라마틱하다. 그는 공공사업진흥국과 민간자원보존단 등의 기관들을 세워 긴급한 단기 정부원조를 시행했고, 임시직과 건설사업의 일자리를 마련했다. 또한 유명한 테네시 강 유역개발공사와 사회보장법을 추진했다. 그리고 그는 상속세와 재산세를 비약적으로 올리고 엄격한 반독점정책이 시행했다. 부가 불편부당하게 상속되거나 다른 사람에게 전달되지 않도록 방지 조치를 만든 것이다. 이 같은 뉴딜정책의 사회주의적인 경향에 대해 경제계를 비롯한 보수 세력들의 저항은 강력했다. 당시 미국에서는 루스벨트 대통령을 ‘좌파 빨갱이’라고 공격하던 보수성향의 사람들이 득세를 하고 있었다. 많은 공화당 의원들, 심지어는 일부 민주당원들마저 그의 정책을 강력하게 반대하고 나섰다. 더욱 루스벨트를 힘들게 했던 것은 반동적 대법원이 ‘뉴딜’의 주요 법안을 거부한 것이다.
하지만 루스벨트는 실망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혹독한 비판을 불러일으킨 ‘법원포위’ 법안을 제안했고, 한편으로는 라디오 방송을 통해서 계속해서 국민을 설득했다. 그때부터 보수정치인과 기득권에 둘러싸인 시장 만능 국가에서 변혁을 주도하는 루스벨트의 리더십은 특출한 것으로 돋보인다. 국민들은 그에게서 희망을 보았고 그의 개혁정책의 대부분은 점차 국민의 지지를 받았다. 그는 어떤 것보다도 광범위한 사회 프로그램들을 계획하고 실행했다.
그리고 그 뒤 25년 이상 민주당 대통령들의 대내 정치 프로그램의 큰 틀이 될 ‘경제 권리의 장전(Economic Bill of Rights)’을 공포했다. 7년이라는 장기간에 걸친 뉴딜정책은 대공황의 위기를 극복했을 뿐만 아니라 미국의 경제와 정치, 사회 전반에 커다란 변혁을 가져왔다.
이러한 그의 공적으로,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미국의 개혁 자유주의를 대표하는 인물로서 미국 역사상 최초이자 마지막 4선 대통령이 되었고 가장 위대하고 존경 받는 대통령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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