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이 또 한 번 바뀌어 신록기(新綠期)에 접어들었다. 중부 산간지방에는 채 녹지 않은 춘설이 쌓여 진풍경을 보여주고 있지만 계절은 엄연히 봄이다. 봄 속의 겨울은 자연이 보여줄 수 있는 신비로움 그 자체다. 매해 겨울은 길었고 봄은 더디 왔다. 봄이 다시 찾아온 것은 자연의 순리며 약속이다.
돌돌돌 흘러가는 계곡 물소리를 들어보라. 얼음장 녹아내린 4월의 계곡은 생명들의 잔치 마당이다. 긴 잠을 깨우는 힘찬 봄의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동백, 개나리, 산수유, 벚꽃이 그 눈부신 자태를 보여주고 있는 이 때쯤이면 산하는 서서히 연둣빛으로 단장을 하고서 맘껏 심호흡을 한다. 그래, 성급한 이들은 산으로 들판으로 바다로 봄 마중을 나간다. 계절 감각이 무딘 사람일지라도 이맘때쯤이면 겨울옷을 벗어던지고 화사한 봄옷으로 갈아입는다. 봄은 이렇게 저마다의 마음속에 가지런히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사계를 고루 누리고 산다는 것은 이 땅의 모든 것들에게 큰 축복이다. 허공에 떠다니는 먼지 한 알, 길바닥에 뒹구는 돌멩이 하나, 나무 조각 하나에서도 존재의 힘을 발견할 수 있음은 그것들이 제 나름의 역할을 충실히 해내고 있기 때문이리라. 한낱 미미한 존재라 해서 어찌 차별할 수 있으랴. 어쨌거나 봄은 이 모든 것들 위에 다소곳이 내려앉았고 사람들은 봄소식을 물고 온 사물들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있다.
봄은 소리로 오기도 하지만 풍경으로 그 실체를 드러낸다. 주택가 담 모퉁이에 살짝 얼굴을 내민 새싹들을 보라. 자연의 경이로움이 온몸으로 전해오지 않는가. 맨몸으로 추위를 견디던 나무들도 가녀린 싹을 내밀고 성큼 다가온 봄을 맞아들이고 있다. 언제나 그랬듯이 자연의 생명력은 끝이 없다.
바람에 묻어오는 봄 냄새가 마냥 좋은 이맘때, 어디를 가 봐도 생물(生物)들의 외침이 그득하다. 꽃샘추위로 굳어있던 몸은 딱딱한 도시를 벗어나면서부터 눈 녹듯 풀린다. 연초록으로 변해가는 산하의 그 너른 품에 안기면 문득 살아 있다는 충만감이 밀물처럼 밀려온다. 맑은 공기가 목을 타고 심장으로 전이되는 순간의 즐거움! 아, 얼마나 기다렸던 봄인가. 봄은 이렇듯 몸과 마음으로 느껴야 한다.
때 묻지 않은 자연을 곁에 두고 있으면 한 편의 아름다운 동화(童話)를 읽는 것처럼 기분이 좋아진다. 이것은 지나친 감상이 아니다. 자연을 동경하고 그리워하는 이들이라면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마음의 선물이다. 이런 심상(心象)을 통해서 삶의 참된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이즈음이면 무슨 약속이나 한 듯이 고향이 떠오르곤 한다. 지금쯤 고향의 봄은 어떤 빛깔로 수놓아져 있을까? 고향집 텃밭 한쪽에는 파릇한 봄나물이 쑥쑥 올라오고 있을 것이다. 추위를 딛고 얼굴을 내민 냉이며 쑥, 달래, 미나리, 두릅들은 봄을 알리는 서곡이었다. 개나리며 버들개지도 노랗고 보송한 꽃망울을 터뜨렸겠지. 뒤이어 진달래며 복사꽃도 피어날 테고.
누구에게나 태초의 고향이 있게 마련이지만 진정한 고향은 자기 자신의 태를 묻은 곳이기보다는 오래 뿌리내리고 사는 곳, 치열한 삶의 현장이 아니겠는가. 고향은 그곳이 어떤 곳이든 삶의 중심이고 근원이다. 고향은 저마다의 영혼을 정갈하고 아름답게 가꿔준다. 고향에 대한 추억은 빡빡한 삶을 좀 더 여유롭고 풍성하게 해준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나는 지금 도시의 한 귀퉁이에서 고향의 봄을 그려 보고 있다. 아니, 자연의 오묘한 섭리에 감사하고 있다. 내일은 집 뒷산에 올라가 자연과 좀 더 가까이 만나고 싶다. 나무와 풀, 새, 하늘과 따뜻한 인사를 나누고 싶다.

글·김청하<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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