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창립 175주년이 맞은 티파니, 긴 시간동안 변함없이 전 세계 소비자의 마음을 사로잡아온 비밀은 무엇일까?
1837년 찰스 루이스 티파니가 뉴욕 5번가에서 친구 존 영과 함께 실버웨어 따위를 판매하며 티파니의 역사가 시작된다. 작은 잡화점에 불과했던 ‘티파니&영’은 가격정찰제와 카탈로그를 이용한 우편 판매를 실시하며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 당시 상거래의 기본이 흥정거래였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굉장히 파격적인 조치였는데, 엄격한 기준으로 책정한 제품의 가치를 함부로 깎을 수 없다는 뚝심의 표현이었다. 가격정찰제에 관한 재미있는 에피소드도 있다. 1861년 대통령 취임 당시 아내를 위해 보석을 구입하러 온 링컨 대통령도 530달러 정가 그대로 지불했다고 한다. 약 100년 후, 아이젠하워 대통령도 티파니의 목걸이를 구입하며 가격을 깎아줄 것을 요구했는데, “링컨 대통령은 할인을 받지 않으셨습니다"라는 굴욕적인 대답을 들어야만 했다.
티파니의 뚝심은 디자인 철학에서 빛을 발한다. 1848년 프랑스 '2월 혁명' 당시, 미국으로 도피한 프랑스 귀족들과 함께 왕가의 진귀한 보석도 미국으로 유입되었다. 40년 후인 1887년, 티파니는 50만 달러를 들여 프랑스왕실 보석의 1/3 가량을 사들이며 ‘다이아몬드의 왕’이라는 칭호를 얻게 된다. 당시만 해도 종교적이고 화려한 유럽스타일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으나 티파니는 프랑스 보석의 과감한 변신을 시도한다. 과할 정도로 장식적인 보석들을 자연스러운 조화와 질서정연한 비례가 강조된 미국적 스타일로 탈바꿈한 것이다. 고전적이면서도 실용적이고 심플한 티파니만의 시그니처 스타일은 이렇게 탄생했다.
디자인에 대한 티파니의 뚝심은 1886년 '티파니세팅'이라고 불리는 '식스 프롱(six-prong)' 다이아몬드반지를 고안하며 다시 한 번 빛난다. 프롱은 뾰족한 갈래라는 뜻으로 바탕금속에서 뻗어 나와 보석을 떠받치는 발 부분을 가리킨다. 티파니세팅은 어떠한 보조석도 달려있지 않은 단순한 디자인으로서 오롯이 6개의 프롱이 들어 올리는 다이아몬드에만 집중한다. 그 어떤 세팅보다 보석을 많이 노출시킬 뿐 아니라, 빛의 반사를 최대화 해 다이아몬드 본연의 광채를 극대화한다.
티파니의 디자인 철학은 굳건하지만 한편으로는 세계 최고의 디자이너들과 함께 새로운 창조를 끊임없이 모색해왔다. 옐로우 다이아몬드를 ‘리본 로제트’ 목걸이로 재탄생시킨 디자이너 장 슐륑베르제는 티파니의 전설적인 디자이너로서, 재클린 케네디 오나시스가 착용해 ‘재키 팔찌’라 불리며 선풍적인 인기를 끈 에나멜 팔찌 역시 그의 작품이다. 파블로 피카소의 딸인 팔로마 피카소도 1980년부터 티파니와 함께 작업하고 있으며, 2006년에는 구겐하임 미술관을 설계한 건축가 프랭크 게리(Frank Gehry)와 콜래보레이션 하기도 했다.
현재 티파니에는 아이러니하게도 티파니란 성을 가진 사람이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새로운 경영진들은 가장 먼저 티파니의 역사와 철학을 연구하며 초심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한다고 한다.
트렌드를 쫓아 함부로 전통을 묵살하거나 브랜드 아이덴티티를 바꾸려 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175년간 이어져온 티파니만의 뚝심, 이것이야말로 누구도 모방할 수 없는 티파니 광채의 비결 아닐까?

안신현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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