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야흐로 꽃철이다. 계절은 속일 수 없어 꽃이 피고 지는 일이 무슨 수학공식처럼 정확하다. 때로는 한겨울에 봄꽃이 피기도 하지만 제철에 핀 꽃이 더 아름다운 건 어쩔 수 없다. 봄을 알리는 개나리, 목련, 진달래, 벚꽃이 온 산천을 물들이더니 뒤이어 복사꽃, 배꽃, 철쭉이 살포시 얼굴을 내밀고 있다. 나 좀 봐달라는 듯 푸른 하늘을 향해 꽃봉오리를 열어놓고 있다.
이즈음 피는 복사꽃은 그 눈부심이 분홍색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여인을 보는 것 같다. 그래서 복사꽃을 보면 누구나 마음이 싱숭생숭해지게 마련이다. 시골집 돌담 옆에 핀 한 그루 복사꽃도 보기 좋지만 여러 그루가 어울려 핀 모습도 무척이나 아름답다. 연초록 화선지에 연분홍 물감을 풀어놓은 듯한 모습이랄까.
담홍색 복사꽃이 피면 봄은 절정에 달한다. 벚꽃이 바람에 날리는 것을 본 게 바로 엊그제 같은데 벌써 복사꽃이 피어나다니…. 세월 참 빠르다는 생각이 절로 드는 이즈음이다. 봄꽃은 그렇게 한순간에 피고 지면서 저마다의 마음에 아름다움과 상실감을 함께 안겨준다.
복사꽃은 매화처럼 고아한 품위는 없다. 그러나 여느 꽃들에게서 찾아볼 수 없는 멋이 숨어 있다. 이리저리 비틀려 올라간 나뭇가지에 연한 홍색의 꽃들이 담상담상 매달려 있는 모습은 한 폭의 수묵화를 보는 듯하다.
몇 년 전 이맘때, 저 영덕의 한 마을에서 본 복사꽃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단조로운 삶이 싫어 훌쩍 찾아간 그곳은 길손을 따뜻하게 맞아 주었다. 봄빛이 완연한 산과 들은 연초록의 생명들로 싱그러웠다. 그 한가운데 마치 분홍색 물감을 칠해놓은 듯 무리 지어 핀 복사꽃! 아, 하는 감탄사가 흘러나왔고, 복사꽃에 깜박 홀린 듯 한동안 서 있었다. 나도 저 꽃처럼 피어나고 싶었다. 하천을 따라 들어선 마을들이 뚝뚝 꽃눈물을 흘리는 것 같았다. 비스듬한 산비탈과 집을 에두른 평평한 밭이 온통 복사꽃 천지였다. 물결처럼 굽이치는 자태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려니 마치 꽃 속으로 들어간 느낌이었다. 탐스러운 꽃송이가 고목의 가지에 잔뜩 붙어 있는 모습은 운치와 함께 품격까지 느끼게 했다. 옆에서 멍하니 꽃을 바라보던 지인은 “야, 정말 장관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가족들을 데리고 오는 건데…”라며 혼자 온 것을 아쉬워했다. 키 큰 복숭아나무 밑으로 오종종 피어난 민들레, 솜다리, 냉이꽃, 할미꽃, 제비꽃 들은 또 얼마나 갸륵하던지. 복숭아나무 옆에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숙인 할미꽃 하나. 양지 바른 비탈밭에는 무수한 봄꽃들이 각양각색의 색감으로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복사꽃 물결은 동해로 흘러드는 오십천을 따라 내내 이어졌다. 복사꽃밭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서 사진을 찍는 사람들의 표정이 꽃물이 든 양 화사해 보였다. 꽃으로 어룽진 산등성이와 하늘의 흰 구름 한 조각을 넣으면 절묘한 작품이 나올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일이 어제인 듯 생생한데 어느 새 몇 해가 훌쩍 흘렀다.
예나 이제나 복사꽃은 진달래와 함께 봄을 가꿔주는 가장 친근한 꽃 중 하나였다. 여기저기 아무 데서나 잘 피는 진달래가 서민적인 꽃이라면 색깔이 분홍빛으로 화사한 복사꽃은 귀족적인 꽃이다. 이런 복사꽃이지만 옛 사람들은 이 꽃을 아주 천하게 여겼다. 조선 중기 때의 학자인 송순(宋純)은 “도리(桃李)야, 꽃인 양 마라”하면서 아예 꽃으로 쳐주지 않았다. 여기서 桃李는 복사꽃을 가리킨다. 그러나 복사꽃이 항상 천대받은 것만은 아니었다. 구한말 황성신문에서는 복사꽃을 국화(國花)로 삼자고 했고, 중국 사람들은 복사꽃을 도(桃)라 하는데, 나무 목(木) 자에 억 조(兆)를 붙여 ‘장수를 뜻하는 나무’로 받들었다. 또 당나라 현종은 복사꽃을 아주 좋아해서, 어느 날 복사꽃을 꺾어 양귀비 머리에 꽂아주면서 “이 꽃이 여인의 교태를 돕는구나.”라고 했다. 도연명은 ‘도화원기(桃花源記)’에서 복사꽃을 이상향(理想鄕)으로 묘사했고, 이백은 ‘산중문답’에서 ‘복숭아꽃 실린 물이 아득히 흘러가니/별천지요 인간 세상이 아니로구나.’라고 노래했다.
초록 세상, 5월이 활짝 열렸다. 이런저런 가족행사들이 계속 이어져 몸도 마음도 바쁜 달이지만 모처럼 집을 떠나 자연 속에 푹 파묻혀 본들 어떠리. 저기 복사꽃이며 철쭉꽃, 배꽃이 어서 오라고 손짓하고 있다. 지금쯤 내 고향땅에도 복사꽃이 피었을까?

글·김청하<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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