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 하나 덜려고, 동생들 학비 보태려고
식모살이며, 가발공장에, 방직기 앞으로 달려갔던
그때 누님들 어떻게들 지내시나, 무얼 하며 사시나
마주앉은 심청 하나는 어느새 일흔
흘러넘치는 눈꺼풀이 시야를 다 가렸는데
사촌 누님은, 그래도 그때가 정겨웠다고
세상없이 씩씩했었다고
독거가 인당수처럼 입 벌린
저 구부정한 안방 속으로
절뚝거리며 건너가야 할 남은 세월은 어쩌자고

-김명인 시 「심청 누님」전문-

임진왜란 3대 대첩 중 하나인 권율장군의 행주대첩 당시, 수적으로 훨씬 우세한 왜군과의 치열한 싸움에서 권율장군의 병사들이 화살이 떨어지고 지쳐서 기세가 꺾여 패색이 짙을 즈음, 여염집 부녀자들이 앞장서서 행주치마로 돌을 날라 투석전을 도우며 병사들에게 용기를 북돋아주어 마침내 행주산성 전투를 승리로 이끌 수 있도록 한 것은 한국여성의 위대함을 보여주는 역사의 한 단편입니다.
1960년대 시작된 이른바 경제개발계획의 일선에서 밤낮으로 재봉틀을 돌린 어린 누님들, ‘닭장집’이라 불렸던 공업단지 인근의 한 평 남짓 어두운 방에서 고단한 삶을 살면서 동생의 학비를 대주고 고향집 부모님께 송아지를 사주었던 누님들은 인당수에 몸을 던진 심청이었습니다.
반만년 역사 동안 수많은 외세침입과 식민지배의 뼈아픈 경험이 있는 이 땅의 젊은이들은 누님들의 헌신적인 희생으로 심청의 아버지처럼 눈이 번쩍 뜨여 산업화를 이룰 수 있는 힘이 생겼고 세계 각국과 당당하게 경쟁할 수 있는 자신과 용기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한국 최초의 공업단지인 구로공단(서울디지털산업단지)이 3년 후인 2015년에는 창설 50주년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 사이 우리의 누님들은 어느덧 일흔 나이가 되었습니다. 뼈 빠지게 일만하면서도 늘 씩씩하고 정겨웠던 젊고 예쁜 심청의 모습은 사라지고 눈꺼풀이 내려앉아 시야를 가려 세상은 점점 희미해져가고 아픈 다리를 절뚝거리며 ‘독거가 인당수처럼 입 벌린 구부정한 안방 속’에서 쓸쓸히 살아가고 있습니다.
위기의 조국을 구한 프랑스의 잔다르크처럼 역사적으로 크게 기록된 영웅은 아닐지언정 가녀린 누님들이 몸을 바쳐 수출입국의 기틀을 마련한 그 헌신은 우리 마음속에 선명하게 자리 잡고 있습니다. 누님이 보낸 준 학비로 공부한 동생들은 모두 어디로 갔고, 초승달 비추는 어둑한 외양간을 환하게 밝혀주던 그 송아지들은 어느 곳에서 힘을 쓰고 있나요? 누님들 건너가야 할 세월이 가을날 구절초 같은데…

-이병룡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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