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 담양의 한 대밭.
대숲에 드니 나도 한 그루 대나무가 된 듯싶다. 하나같이 쭉쭉 뻗어 오른 자태를 보고 있자니 내 키가 한 뼘쯤 더 자란 것 같다. 댓잎 끝에는 푸른 하늘이 걸려 있다. 보이는 건 온통 푸름 덩어리. 대나무의 행렬이 끝이 안보일 정도로 펼쳐져 있다. 맑고 순수하고 깨끗한 ‘힐링(healing·치유)의 숲’이다.
조금 안쪽으로 들어가자 키 낮은 대나무에 포위되어 몸을 움직일 수조차 없을 지경이다. 대나무는 그렇게 내 몸과 마음에 청신한 기운을 듬뿍 안겨주었다.


사철 푸르고 곧게 자라는 대나무를 보면 나도 문득 저 나무처럼 심신을 활짝 펼치고 싶어진다. 사방으로 쭉쭉 뻗은 그 모습은 한국인의 기상을 쏙 빼어 닮았다.
댓잎에 서걱대는 바람 소리를 들어보았는가. 하늘을 향해 발돋움을 한 대나무를 보면 마음 한 자락이 그렇게 청신할 수 없다. 거침없이 뻗어 올라, 어디 한 군데 흐트러짐이라곤 찾아볼 수 없다. 단정하면서도 기개가 넘친다.

대숲길을 하염없이 걸어본 적이 언제였던가. 오늘 다시 그 길을 걷고 있으려니 감개가 무량하다. 마음이 답답할 때면 언제나 대숲이 생각났다. 모처럼 찾은 담양의 대숲은 그 모습 그대로였다. 이따금 새들 우짖는 소리만 들릴 뿐 고요하기 그지없다. 느닷없는 인기척에 놀란 듯 대숲이 한 순간 부르르 떤다. 댓잎을 스치는 바람 소리다. ‘솨, 솨, 솨…. 훤칠한 줄기가 한쪽으로 기울었다 제자리로 돌아오기를 반복한다. 가냘픈 잎사귀의 잔 떨림을 오래도록 지켜본다.
예로부터 우리 민족은 대를 생활 속으로 깊숙이 받아들였다. 대는 그 꼿꼿함 때문에 지조와 절개를 상징했다. 사군자(四君子)의 하나로 취급한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다. 시경(詩經) 위풍(衛風)에 보면 대를 일러 “훌륭한 저 군자여, 잘라내고 다듬고 쪼고 갈아 자신을 닦는도다”라고 하였다. ‘대쪽 같은 사람’이라는 표현은 불의나 부정을 용납하지 않는 꼿꼿한 성품을 지닌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한 그루의 청죽(靑竹)이 풍기는 그윽한 멋. 대는 사철 푸른빛을 잃지 않지만 초목이 우거지는 봄에서 가을까지 그 참모습을 드러낸다. 자연을 사랑하고 멋과 운치를 즐기는 이들에게 대나무는 평생을 함께 할 벗이고 스승이다. 대나무가 심어진 집에서는 뭔가 다른 격이 느껴진다. 집 주인의 사상이며 안목을 높이 쳐주게 된다.
흰눈 속의 대숲은 또 얼마나 아름다운가. 대나무에게 엄동설한은 시련이 아니라 기쁨이다. 혹한을 이겨낸 대나무는 그 기품이 더욱 돋보인다. 대가 세한삼우(歲寒三友)의 하나에 드는 것도 이 같은 생명력 때문이리라. 소나무, 매화와 함께 청한(淸閑)의 서정을 보여주는 대의 삶이야말로 우리가 본받아야할 삶의 지표가 아닌가 한다.


대숲으로 간다/대숲으로 간다/한사코 성근 대숲으로 간다/자욱한 밤안개에 벌레소리 젖어 흐르고/벌레소리에 푸른 달빛이 배어 흐르고/대숲은 좋더라/성글어 좋더라/한사코 서러워 대숲은 좋더라/꽃가루 날리듯 흥근히 드는 달빛에/기적 없이 서서 나도 대같이 살거나.

대숲 한쪽에 붙여진 신석정의 시 ‘대숲에 서서’를 가만히 음미해본다. 대를 문학의 소재로 즐겨 다룬 예는 많이 찾아볼 수 있다. 대나무는 언제나 맑고 개결하며 탐욕과 거짓을 버린 모습으로 등장한다. 문학가들은 늘 푸른 대를 보고 그 속에서 우러나는 맑은 영혼을 높이 샀던 것이다.
영산강 상류에 자리 잡은 담양은 계절색이 뚜렷해 일찍부터 대나무가 자라는데 최적의 조건을 갖추었다. 기온과 강수량이 대나무 재배지로 딱 알맞다. 집집마다 대나무가 있고, 대나무가 있는 곳에는 으레 마을이 있다. 죽향, 담양에서는 2015년 ‘대숲에서 찾는 녹색미래’를 주제로 ‘담양세계대나무박람회’가 열린다. 향토자원인 대나무를 세계에 널리 알리기 위한 일환이다.
담양에 가지 않아도 우리 주변에서 대를 보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대나무가 삶 깊숙이 들어온 현장을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아파트 빈터에, 시골집 마당가에, 호숫가에, 공원에, 바닷가 언덕에, 절집 뒤꼍에 대나무는 이제 우리네 생활 속으로 더 가깝게 옮겨 앉았다.
우후죽순. 대도 다른 식물처럼 생애가 있다. 죽순은 대나무의 어린 싹이다. 고요한 대밭에 불쑥 얼굴을 내민 죽순의 거룩함. 바위를 뚫고 나올 정도로 끝이 단단하고 날카롭다던가.
이제 대숲을 떠나면서 쭉쭉 뻗은 대나무의 정기를 마음속에 담아둔다. 다시 찾아올 그 날을 위해.

- 김청하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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