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뜬금없이 이 겨울, 충북 옥천군으로 여행을 갔을까? 때로는 그 계절에 꼭 맞는 여행지가 아닌 곳도 찾을 때가 있다. 오히려 화려하지 않은 소읍 여행이 황금처럼 눈부시게 빛나지 않아도 매력적으로 가슴 한 켠을 깊숙이 채워낼 수 있으니 말이다. 옥천 주민들이나 관계자들조차, ‘이곳은 볼거리가 없다’라는 말을 스스럼없이 하는 것은 그만큼 보유하고 있는 관광자원이 적기 때문이다. 한발 뒤로 물러서 있는 듯해서, 옛 향기가 그대로 느낄 수 있지 않겠는가? 실제로 옥천군 구읍에는 시대를 거슬러 가는 듯한 느낌이 여실히 남아 있었다.

옥천 나들목을 나와 우선 찾아간 곳은 정지용 생가다. 구읍이라는 지명으로 불리는 마을엔 높은 건물이 없다. 70년대의 모습을 그려낼 수 있을 정도의 오롯한 시골 동네. 소복하게 눈이 내려 온 천지가 하얗게 변했다. 나름 사람들이 찾는 듯, 화려하지 않은 식당들 골목을 빼곡히 채우고 있다.
정지용(1902~1950) 생가 앞으로는 실개천이 흐르고 있다. 반쯤 열려진 사립문 안쪽으로 들어가면 복원된 1자형 초가집이 있다. 현재의 생가는 1974년에 허물어지고 다른 집이 있었다가 1996년 7월 30일에 옛 모습대로 복원한 것이다.
‘입춘대길’이라는 붓글씨가 걸려진 방안에는 시인이 살았던 당시를 재현해내고 있다. 마당 장독대에는 하얀 눈이 쌓이고 볏짚으로 만든 이엉에도 고드름이 맺혔다. 이리 기웃, 저리 기웃하면서도 머릿속에는 계속 박인수 성악가와 이동원 대중가수가 함께 부른 ‘향수’라는 노래를 웅얼거리게 된다.
넓은 벌 동쪽 끝으로/옛 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회돌아 나가고/얼룩배기 황소가/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어쩌면 시인을 가깝게 알게 된 것도 향수라는 가요 덕분일 것이다.
1989년 10월3일, 정지용 시인 흉상제막기념공연이 호암아트홀에서 있었다. 가수 이동원과 테너 박인수가 무대에 섰고 정지용의 시 ‘향수’를 가사로 한 노래를 열창했다. 그렇게 시인은 우리 곁으로 아주 가깝게 다가섰다.
생가를 나와 문학관으로 간다. 문학관은 생가가 복원된 후, 1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2005년 5월에 세워졌다. 입구의 물레방아, 정지용 동상 등으로 꾸민 작은 공원을 지나쳐 안으로 들어가 문화해설사를 만난다. 시인은 어떤 삶을 살았을까? 1914년 3월 25일 옥천공립보통학교(현재의 죽향초등학교) 4년제를 4회로 졸업했다.
시인은 그 당시 풍습에 따라 12살 때(1913년) 동갑내기 부인 송재숙과 영동군 심천면 초강리 처가에서 결혼했다. 17세(1918년) 때에 서울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한다. 휘문고보 재학 중에는 박팔양 등과 함께 동인지 ‘요람’을 발간하기도 했다.
그후 일본 도시샤(同志社) 대학의 예과에 입학했다. 1875년 선교사에 설립된 이 대학은 칸사이(관서지방)지방의 4대 대학의 하나. 기독교계 대학이지만, 한국의 일부 기독교계 학교와 달리 학생들에게 교내 예배 선택권을 인정하여 신앙을 강요하지 않는, 자유로운 곳이었다고 한다.
그러다 2001년 남북 이산가족 상봉 때 북에 있는 그의 셋째 아들 정구인이 아버지와 큰 형을 찾는다는 신청이 있어 세상을 놀라게 한다. 정구인은 51년 만에 큰 형과 누이동생을 만났다. 삼남은 아버지를 찾으러 갔다는 말이 전해 오는데 상봉할 당시 아들 또한 아버지의 소식은 몰랐다고 한다. 그래서 시인이 어디서 죽었는지, 어디에 묻혔는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단지 시인의 시집인 정지용 시집(시문학사, 1935), 백록담(문장사, 1941), 지용시선(을유문화사, 1946)과 소설 ‘三人’(서광, 1919)과 평론집인 ‘문학독본’(박문출판사, 1948), ‘산문’(동지사, 1949)등이 남아 시인의 행적을 보여주고 있다.
또 구읍에는 육영수여사(1925∼1974) 생가(충청북도 기념물 123호)가 있다. 생가는 육여사가 1925년에 태어나 1950년 박정희 전 대통령과 결혼 전까지 살았던 곳이다. 99칸이나 되는 고택이다. 원래 이 한옥은 1600년대 민씨, 김씨, 송씨의 가문에서 3정승이 거주하여 삼정승의 집이라 불리던 곳. 조선 후기 양반집의 전형적 양식을 갖추고 있다. 고택은 1920년에 육영수의 아버지인 육종관이 민정승의 자손 민대감에게서 사들였다고 한다. 생가는 육여사 서거 이후 폐가처럼 변해 1999년 완전 철거됐다. 이후 생가 터 상속권자가 옥천군에 부지를 기부했고 지난 2005년부터 복원 작업에 들어갔다. 건물은 웅대하나 오래 묵은 느낌이 없는 것은 그 이유다.
생가 안채로 들어서면 행랑채 뒤켠으로 안채가 있고 그 뒤켠에는 사당과 뒷채가 또 있다. 안채 뒤켠에는 육여사의 살아생전 모습들을 사진에 담아 걸려 있다. 그리고 바로 옆에 육여사가 살던 방이라는 팻말이 있다. 99칸의 대갓집이지만 육 여사가 어릴 적 살던 방은 아주 비좁다. 마치 골방 같은 느낌이 드는 방이다. 방안에는 재봉틀, 다리미가 있고 옷을 넣는 문갑, 거기에 문방사우가 있는 책상 등이 있어 더욱 비좁게 느껴진다.

■여행정보
○ 정지용 생가 : 옥천군 옥천읍 하계리 40-1, 043-730-3588, 정지용 문학관:하계리 39, 043-733-6078
○ 육영수 여사 생가 : 옥천군 옥천읍 하계리
○ 가는 길 : 경부고속도로 옥천IC-구읍쪽으로 가면 된다.
○ 기차편 : 서울역(06시 15분~19시 40분)에서 1시간 20분 간격으로 운행된다. 2시간 10분정도 소요/버스편:동서울터미널에서 14시, 18시. 2시간 정도 소요. 대전까지 와서 시내버스 607번을 이용하는 것이 좋다.
○ 추천 맛집 : 원조구읍할매묵집(043-732-1853)은 재료를 자연산을 이용하는 보기 드문 집이다. 또 대박집(충청북도 옥천군 옥천읍, 043-733-5788)은 금강 상류에 서식하는 민물고기를 갈아 넣고 된장과 고추장으로 육수를 낸 생선 국수와, 피라미를 프라이팬에 튀겨 고추장 양념을 발라 만든 도리뱅뱅이가 인기다.

- 글·사진 이신화 http://www.sinhwada.com

저작권자 © 중소기업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