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려하지도 요란스럽지도 않은 품위

겨울이 봄에게 그 자리를 내어주는 때다. 산간지방은 아직 추운 겨울이지만 남녘은 봄기운이 스멀스멀 퍼지기 시작했다는 소식이다. 이렇듯 계절의 순환은 어김없다.
절기상으로 우수 경칩 무렵이면 겨우내 얼어붙었던 땅도 풀리고 양지녘에는 아지랑이가 피어오른다. 저 나무들을 보라. 일제히 움을 틔우고 있지 않은가. 모진 시련을 이기고 다시 태어나는 자연의 생명력이 놀랍기만 하다. 영원히 깨어나지 않을 것 같은 생명들이 일제히 기지개를 켜는 모습은 자연의 신비요 경이로움이다.
오늘 아침 흰 눈 속에 핀 동백꽃을 보았다. 신문 한 귀퉁이에 실린 그 사진을 보는 순간 아, 봄이구나 하는 환희가 온몸으로 밀려들었다. 꽃을 바라보는 사진 속 여인의 표정은 마냥 행복해 보였다.
봄을 알리는 꽃은 무수히 많지만 동백은 그 강렬함이 눈부실 정도다. 고목의 가지에 담상담상 매달린 새빨간 꽃봉오리는 그 누구를 유혹하는 것인가. 동백(冬柏), 그 이름에서 보듯 겨울을 상징하면서 봄을 여는 꽃이다.
3월에서 4월 사이에 꽃이 핀다고 해서 ‘춘백(春柏)’이란 이름도 얻었다. 누구는 눈 속에 핀 동백꽃을 보아야 진짜 동백꽃을 보는 것이라 했다. 그런 모습을 매해 봐 왔는데, 볼수록 작은 감동을 느낀다. 동백의 또 다른 이름, ‘한사(寒士)’는 그래서 얻은 이름이 아닌가 한다. 새봄에 꽃을 볼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황량하던 들판도 머잖아 연초록으로 몸단장을 시작하겠지. 들과 산에 생기를 가득 내려줄 것이다.
동백은 그 청초함이 보면 볼수록 마음을 끈다. 짙은 녹색의 이파리에 살포시 꽃봉오리를 내민 모습이 이제 막 성년기에 접어든 청춘을 보는 것 같다. 모처럼 외출을 하기 위해 곱게 단장한 여자의 자태가 저런 모습일까. 화려하지도 요란스럽지도 않은 그 모습에서 어떤 절개와 품위를 느끼게 된다. 중국에서는 동백을 산다화(山茶花)라 한다던가. 사철 시들지 않는 잎은 두껍고 반짝반짝 광택이 난다. 그래서 사절목(四節木)이라 부르기도 한다.
전남 여수 앞바다의 작은 섬, 오동도. 동백나무가 숲을 이룬 이 섬에는 애틋한 전설 하나가 전해 내려온다. 한 아름다운 여인이 도둑에게 쫓기다가 바다에 빠져 죽고 말았다. 이를 가엾게 여긴 사람들이 시신을 거두어 양지에 묻어 주었다. 세월이 흐른 뒤 그 무덤에서 한 나무가 자라나 온 섬을 뒤덮으니, 이게 바로 동백이다. 그 후로 사람들은 동백꽃의 아름다움은 그 여인의 미모에서 왔다고 믿고 있다.
동백꽃이 떨어지는 모습을 보았는가. 아직 시들지 않은 떨기가 뚝 뚝 소리를 내며 땅바닥으로 떨어지는 모습을 보고 어떤 이는 ‘처연하다’고 했다. ‘비정한 칼날에 떨어지는 아름다운 여인의 머리 같다’고 표현한 이도 있다.
‘눈물처럼 후두둑 지는 꽃’이라는 노랫말처럼 붉은 꽃잎과 노란 수술이 통째로 똑 떨어지는데 감정이 풍부한 사람은 그 모습을 보고 눈물을 흘릴 것 같다.
누가 그랬던가. 떨어진 동백은 낙화(落花)가 아니라 절화(折花)라던가. 그래서 더 처연한가.
옛 선비들은 동백을 매화와 함께 높이 기렸다. 동백나무를 엄한지우(嚴寒之友)에 넣어 그 기개를 찬양한 것이 이를 잘 말해준다. 일찍이 허백련(許百鍊.동양화가) 선생은 동백을 매화 대나무와 함께 세한삼우(歲寒三友)로 받들었다. 소나무 대신 동백을 넣은 이유를 어렴풋이 알 것 같다.
동백은 꽃에 날아드는 동박새가 만든 결정체이다. 동박새는 동백꽃의 꿀(꽃가루)을 먹고 사는 새이다. 동백꽃을 조매화(鳥梅花)라 부르는 것은 벌이나 나비가 아닌 동박새에 의해 수정이 이뤄지기 때문이다. 고운 황색 깃털을 가진 동박새는 ‘삐죽삐죽’ 소리를 내며 달디단 꿀맛을 찾아 동백나무로 날아드는데, 크기나 모양이 참새를 닮았다.
추운 겨울날 먹이를 찾기 마땅치 않은 동박새에게 동백나무가 가지고 있는 꿀은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식량이 된다. 둘은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 공생관계인 것이다. 혹시 남쪽의 오동도나 거제도, 거문도, 지심도를 찾게 되면 동백숲을 유심히 관찰할 일이다. 혹시 아는가. 그 새빨간 꽃무리 속에서 동박새를 보는 행운을 누리게 될지.
지금 남쪽에선 차디찬 기운을 뚫고 선홍빛 꽃망울을 터뜨린 동백이 지천이다. 꽃샘추위가 기승을 부리는 이맘때쯤, 남녘으로 꽃 마중을 나가 볼 일이다. 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피어난 새빨간 꽃잎, 꽃잎들은 메마른 가슴에 샘물 같은 청신함을 불어넣어줄 것이다.

- 김청하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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