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는 아파트 거실에는 몇 분(盆)의 난이 청아한 향기를 뿜고 있다. 난을 기른 지는 그리 오래 되지 않았다. 내가 난에 관심을 두게 된 것은 그 향기가 좋아서이다.
누가 그랬던가. 난은 성급한 사람을 가르치는 스승이라고. 나는 이 말을 이렇게 바꿔보고 싶다. 난은 화장 안한 시골 처녀의 수더분한 얼굴 같다고 말이다. 그 모습은 뭐랄까, 단아하면서 순결한, 뽐냄이 없는 고결한 기품을 지녔다.
난초 잎을 가리켜 ‘막 목욕하고 나선 소녀의 머릿결처럼 미끈하고 향기롭다’고 표현한 이도 있고 보면 난은 저마다의 가슴속에 언제나 푸른 빛깔로 자리한다.
난초의 자태는 보면 볼수록 마음을 끈다. 요즘 난을 기르면서 새삼 느끼는 바가 있다. 정성을 들이면 들일수록 향기는 더욱 짙고 결코 시들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난을 통해 배우는 하나의 교훈이다.
예로부터 사군자의 하나로 쳐 왔던 난초는 기르기가 매우 까다로운 식물이다. 눈에 잘 띄는 곳에 놓아두고 물만 주어도 된다고 생각하면 판단 착오다.
아기를 키우듯 정성과 보살핌이 있어야 제대로 자란다는 말이다. 난 키우기를 즐기는 이들은 따듯하지도 그렇다고 서늘하지도 않은 알맞은 온도에 햇볕도 직사광선을 피해야 되고, 하루에 두 시간 이상은 햇볕을 꼭 쬐어야 하며, 겨울에는 방에 들여놓고 햇볕을 쬐어야 하는 번거로움이 늘 따라다닌다고 말한다.
이렇게 본다면 난 기르기는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난을 좋아하는 마음 그 이상의 무엇이 있어야 진정한 애란가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지극정성이 있어야 함에도 가끔 잊고 소홀할 때가 있다. 하여 몇 년간 몇 분의 난을 버린 일도 있다.
물을 주는 방법을 익히는 데만도 삼년을 참고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첫 해는 썩혀서 죽이고, 두 번째 해는 말려서 죽이고, 세 번째 해가 되어야 비로소 물주는 요령을 조금이나마 터득하게 된다니 난 기르기의 어려움을 알겠다.
꽃을 보기란 더더욱 어렵다. 가녀린 잎에서 금방이라도 꽃이 필 것 같지만 도무지 그 예쁜 자태를 보여주지 않는다.
그러다가 어느 날, 긴 기다림 끝에 먼데서 온 손님처럼 불쑥 얼굴을 드러낸다. 아, 저 자줏빛 꽃대궁! 그렇다. 난은 결코 서두르거나 경망스럽게 아무 데서나 꽃을 피우지 않는다.
마치 발효식품처럼 천천히 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것을 사람에 대비해 본다면 홀로 갖은 고생을 겪은 뒤에야 제 구실을 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한 송이의 꽃은 침묵과 명상이 만들어낸 결정체이다. 나는 난을 감히 꽃 중의 꽃이라 말하고 싶다. 꽃을 볼 수 있는 기간이 정해져 있는 대부분의 꽃들과는 달리 난은 두고두고 꽃과 향기를 즐길 수 있으니 이 얼마나 보배로운가.
난은 마치 수줍은 소녀처럼 세상으로 나오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한다. 깊은 산 속에서 홀로 피어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거개의 꽃들이 얼굴에 미소를 잔뜩 머금고 아양을 떨거나 사람을 유혹해도 난만은 그 성숙함을 잃지 않는다. 온갖 빛깔로 자랑을 일삼는 꽃과는 격이 다른 것이다.
난과의 교감, 난과의 대화는 난을 오래 길러본 사람만이 알 터이다. 똑같은 시간에 똑같은 방법으로 물을 주어도 주인이 줄 때와 그렇지 않을 때가 다르다고 한다.
또 난초를 보고 예쁘다고 하면 잎에 윤기가 돌고 꽃이 잘 핀다고 하는 얘기도 있다. 이걸 어찌 과장된 이야기로 흘려버릴 것인가. 대수롭잖게 보면 한 포기 풀과 별로 다를 것 없는 난도 직접 길러보면 그 높은 기질을 발견하게 된다.
이슥한 밤, 창 밖 야경을 바라본다. 내 옆에는 난초 두어 분이 고요한 명상에 빠져 있다.

- 김청하 수필가

저작권자 © 중소기업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