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는 아파트에서는 하루가 다르게 봄빛을 더해가는 들판이 훤히 바라보인다. 꽃샘추위가 기승을 부리는 이즈음이지만 계절의 순환은 돌릴 수 없다. 아파트 화단에는 아직 꽃망울이 열리지 않았지만, 목련이며 개나리가 그 여린 눈을 매단 채 나른한 햇살을 받으며 자울자울 졸고 있다.
본격적인 농사철을 맞아 논과 밭에서는 농부들이 나와 흙갈이를 하느라 여념이 없다. 올해도 풍년을 기원하며 흙을 일구는 그네들의 모습을 보면서 새로운 한 해의 희망을 읽게 된다.
비탈밭 양지녘에 오종종 모습을 드러낸 나물들은 봄을 알리는 서곡이었다.
아지랑이 피어오르는 봄날 오후, 호미와 소쿠리를 들고 들판에 나가면 봄나물들이 지천으로 깔려 있었다. 한 시간 정도 품을 팔면 그날 저녁 반찬거리로 충분했다. 소쿠리 가득 냉이며 달래를 캐오면 어머니께서는 정성스레 다듬어 맛있는 반찬을 만들어 주셨다. 향긋한 어린잎과 뿌리를 넣어 끓인 냉이토장국과 알싸한 달래를 간장에 양념한 달래장 맛을 어찌 잊을 수 있을까.
우리나라에는 4천 종이 넘는 야생식물이 있는데, 그 중에서 8백여 종이 식용식물이라고 한다. 이런 식용식물 가운데 우리 식탁에 오르는 것은 그 수가 많지 않다.
우리 산야에 널려 있는 산나물 들나물들은 재배 채소에 밀려 빛을 보지 못하고 있다. 야생나물은 영양분도 풍부하지만 무공해 자연식품이라는 점이 사람들의 구미를 돋운다. 야생나물의 장점은 상큼한 향과 감칠맛에 있다. 이 맛에 매료된 사람들은 밥상에 나물이 오르지 않으면 왠지 허전해 밥맛이 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남녘으로부터 달려온 꽃 소식이 중부 내륙까지 올라와 온 산하가 꽃불로 활활 타오를 즈음부터 산나물 들나물이 제철을 맞는다. 이때쯤이면 어느 집이나 아침저녁 밥상에 냉이나 달래무침 따위의 산나물 들나물 한두 가지는 으레 오르게 마련이다.
봄나물 중에 가장 쓰임새가 많은 것이 쑥이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나물이기도 하다. 그 종류가 무려 30여종에 이른다던가. 쑥은 우리 겨레와도 인연이 깊은데, ‘단군신화’에는 신령스러운 먹거리로 나와 있고, ‘동국세시기’에는 액막이로 등장하는 걸 볼 수 있다.
쑥을 깨끗이 씻어 물기가 다 빠진 다음 멥쌀가루에 비벼 찜통이나 시루에 쪄낸 쑥범벅, 쑥과 쌀을 함께 반죽해 손바닥만하게 빚어 삶아 내거나 쪄낸 쑥개떡, 찹쌀가루에 비벼 절구에 쳐내면 쑥인절미, 된장을 풀어 끓이면 쑥국이 되었다. 녹즙이나 술을 담가 먹기도 했으며 차로도 즐겨 마셨다. 위장병, 냉증, 지혈을 위한 약재로도 그만이라고 한다.
요즘 대도시의 재래시장이나 백화점에 가보면 봄나물들이 많이 나와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것들은 대부분 재배한 것들로 야생나물과는 차이가 있다. 케일, 앨팰퍼, 브로콜리, 셀러리, 파슬리, 아스파라거스, 꽃양배추, 치커리, 레티스 같은 이름도 낯선 서양채소(양채류)가 우리 식탁에 오르는 현실이고 보면 이제 토종 나물이 설 자리는 점점 좁아지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조바심이 든다.
우리나라 음식에 나물 요리가 발달한 까닭은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 보릿고개 시절, 마땅한 먹을거리를 찾아 들녘을 헤매다 지천으로 널린 풀을 뜯어먹었는데, 그게 나물로 발전했다는 것이다. 곡물이나 고기류를 섭취하기가 어려웠던 그 당시 나물은 생명을 잇게 해준 것이었다.
한때 맛도 없고 영양가도 없는 음식으로 인식되기도 했던 나물이 최근 들어 과학적인 연구로 그 신비한 힘이 하나 둘 밝혀지고 있다.
특히 육식을 즐겨 먹고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현대인들에게 꼭 필요한 음식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나물에 함유된 단백질, 무기질, 필수지방산 들은 일반 채소류(배추, 시금치, 상추 따위)의 것보다 우수하다고 한다. 이렇게 볼 때 봄나물은 누구나 챙겨 먹어야 할 보약이나 다름없다.
입맛을 잃기 쉬운 계절, 우리 토종 나물로 건강한 삶을 꾸려 나가자. 어머니 손으로 정성껏 버무려주시던 상큼한 달래무침, 그 참맛을 잊을 수 없다.

- 김청하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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