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핍과 자존심을 바꾸지 않은 가족 이야기

베이비부머 세대는 영화 감상의 정도를 밟을 수밖에 없었던 행운의 세대라 할 수 있다. TV가 ‘주말의 명화’라는 타이틀 아래 흑백 고전 영화를 많이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요즘 세대는 최신 흥행 영화의 유혹에 방치되어 고전을 볼 기회를 잃어버렸다.
모든 예술/학문이 그러하듯 고전부터 감상/공부하지 않으면 깊이가 없을 수밖에 없으니 시네마테크, 한국영상자료원, 영화제 등을 찾는 수고를 할 수밖에 없다. 그보다 편한 고전 감상의 길은 DVD를 무료 대여하고 있는 국공립도서관 이용이다.
엘리아 카잔 감독의 <브루클린에서 자라는 나무 A Tree Grows in Brooklyn>(이하 <브루클린->) 감상도 도서관 덕분에 가능했다. 카잔은 마틴 스콜세이지 같은 현대 영화 작가들이 존경해마지 않는 위대한 감독이다.
그러나 카잔은 매카시 선풍이 불던 1952년, 의회 반민주활동위원회에 소환되어 공산당원이었음을 고백하고, 자신이 알고 있던 영화인 당원들 이름을 댔다. 이로 인해 카잔은 <신사협정>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혁명아 자파타> <워터프론트> <에덴의 동쪽> <초원의 빛>과 같은 감탄스러운 필모그라피에도 불구하고 그를 경원시하는 영화인들이 적지 않다.
그리스 혈통의 엘리아 카잔은 연극 연출을 하다 1954년, 베티 스미스의 베스트셀러 소설이 원작인 <브루클린->으로 영화감독 데뷔했다.
<브루클린->은 가족의 신화를 믿지 않는 냉정한 현대인이라도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흑백 고전이다. 감동을 강요하는 신파조가 아닌 인간에 대한 믿음과 오해, 유한한 삶, 이상을 억누르는 현실을 목도하는 데서 오는 이성의 소용돌이로 눈물이 흐른다. 통곡을 해도 시원치 않을 만큼 울컥하는 감정을 유발하고선, 이내 차분하게 다독이는 자유자재의 연출에 감탄하며 놀란 가족을 응원하게 된다.
<브룩클린->이 서민 가정의 소소한 일상을 그리면서도 감동을 안겨주는 것은 이들이 궁핍과 자존심을 맞바꾸지 않기 때문이다. 정직과 노력만으론 살아가기 어려운 세상에서 희망을 잃지 않으려는 아버지, 어린 자녀에게도 잘못을 반성하고 고백하는 어머니의 용기, 놀란 가족을 포옹하고 베풀 줄 아는 이모, 기다릴 줄 아는 사랑을 하는 경찰관 맥신, 가난한 유족을 배려하며 외상 대금 대신 부조금을 전하고 일까지 제안하는 술집 주인 맥가리티, 언젠가 15달러가 생기면 피아노를 찾으러 오겠다는 노부인 등 모든 캐릭터가 결점과 미덕을 지닌 인물로서 크고 작은 교훈을 전한다.
무엇보다 영화 제목이자 주제를 전달하는 주요 소재이며 극 중에 자주 언급되기도 하는 나무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새 소리를 들을 수 있어 온 가족이 좋아하던, 아파트 공공 마당의 나무가 잘리는 걸 본 프랜시가 아버지에게 “나무를 죽여요.”라고 하자 아버지는 이렇게 말한다. “나무는 쉽게 죽지 않는다. 시멘트 바닥에서도 자라지 않았니. 누가 심은 것도 아니고 자라라고 부탁하지도 않았지만 오래된 시멘트를 뚫고 저렇게 자라지 않았니.”
정직하게 살아가는 이들을 위무해주는 고전 <브룩클린->은 1945년 ‘내셔널 보드 오브 리뷰’지가 선정한 1945년 ‘탑 텐 필름’에 뽑혔다.

- 옥선희 영화칼럼니스트 eastok7.blog.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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