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겨울이 물러가자 산과 들에는
기다렸다는 듯이 온갖 꽃들이
다투어 피어나고 있다.
매화와 동백은 진작 얼굴을 내밀었고
봄이 깊어가면서 개나리와 산수유가
그 노란 자태를 드러내고 있다.
곧 목련과 진달래, 벚꽃과 복사꽃도
차례로 피어나겠지.
바야흐로 자연의 대반란이 시작된 것이다.
꽃을 ‘자연의 어머니’라고 말한 분도 있지만
꽃이 지닌 신비와 오묘함은
그 자체가 감동이고 예술이다.
모양이며 색, 피는 시기와 맺는 열매는 달라도
아름다운 한 송이 꽃을 피우기 위해
갖은 고난을 이겨낸다.
참으로 위대한 자연의 법칙이다.

내가 사는 아파트 정원에는 유백색의 목련이 꽃눈을 부풀리고 있다. 해마다 그랬듯이 4월 초순쯤이면 그 화사한 꽃봉오리가 날 보란 듯이 벌어지는데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답다. 그 때가 빨리 오기를 기다리는 내 마음은 벌써부터 설레기 시작한다. 마치 달밤에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리는 마음처럼.
아무리 아름다운 꽃이라 할지라도 외진 곳에 피어나 사람들의 눈길을 받지 못 한다면 정말 애석한 일이 아닌가. 세상에 자신을 드러내기 싫어 꼭꼭 숨는 꽃도 분명 있을 것이다. 깊은 산 속에 홀로 피어나 하늘만 보고 사는 이름 모를 꽃나무의 사연을 누가 헤아려주랴.
모든 이들이 두루두루 즐길 수 있는 꽃, 목련은 그래서 더 친근하고 아름답다. 수줍은 듯 살짝 얼굴을 붉힌 저 목련을 보면 나도 꽃처럼 피어나 세상 사람들의 시선을 한몸에 받고 싶어진다. 진달래가 곱게 치장한 새색시 같다면 목련은 수더분한 시골 아낙네 같다. 한지를 닮은 고운 빛깔하며 여미듯 살짝 올라간 봉오리는 수줍음을 잔뜩 머금은 앳된 처녀를 보는 것 같다. 티끌 하나 묻어 있지 않을 것 같은 순결한 꽃송이와 은은히 번지는 향기는 하늘이 준 선물이다. 곧 지고 말 목련이기에 만날 때마다 윙크로 영혼의 교감을 나눠보곤 한다.
누구를 애타게 기다리는 것인가. 아니면 그리움을 안으로 삭이는 것인가. 손에 와 닿는 꽃의 감촉이 참으로 부드러워서 한참 동안 꽃에서 손을 떼지 못한다. 투명한 그리움, 아니 은근한 그리움을 살며시 뿜어내는 저 목련 한 송이. 꽃이 아름다운 것은 그 고운 자태를 일 년 내내 볼 수 없기 때문인지 모른다. 아무리 아름다운 목련꽃일지라도 사철 내내 보게 되면 지치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때 맞춰 피고 지는 꽃들에게 고마워해야 한다. 자연의 변화를 은총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내가 사는 주위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꽃을 볼 수 있다는 게 참으로 고마울 뿐이다. 목련을 찾아 나서는 길은 그리운 님을 만나러 가는 것처럼 가슴이 콩닥콩닥 뛴다. 그렇게 길을 걷다가 봉오리가 반쯤 벌어진 목련꽃을 보았을 때, 내 가슴은 또 한 번 뛰기 시작한다. 이런 주체할 수 없는 설렘은 목련이 질 때까지 내내 이어진다. 참으로 오묘한 마음의 움직임이다.
진달래나 복사꽃처럼 화려하지는 않지만 보면 볼수록 마음을 끄는 그 소박한 자태가 더없이 좋다. 그래서 해마다 이맘때쯤이면 감수성 예민한 소녀처럼 들떠 있곤 한다. 꽃눈 벌어지는 소리가 귓전을 맴도는 것 같아 잠을 설친 적도 있었으니 이거야말로 목련병이 도져도 단단히 도진 것이다. 정말 기분 좋은 일이 아닌가.
미끈하게 뻗어 올라간 목련나무와 장식 등(燈)처럼 달랑달랑 매달린 백목련을 보면 그렇게 아름다울 수 없다. 나뭇가지에 학이 앉아 있는 것 같은 순백봉우리는 여성적인 아름다움을 한껏 뿜어내고 있다.
목련꽃 그늘 아래서 맛보는 행복. 바람을 타고 밀려드는 달큼한 향기는 또 어떤가. 그 향기가 1킬로미터까지 미친다고 했다. 목련은 꽃뿐만 아니라 나무에서도 향기가 난다. 나무껍질에서 향수의 원료를 뽑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 진한 향기를 가만히 맡고 있으면 혼을 빼앗긴 듯 몽롱해진다. 아름다운 유혹이다.
목련이 유독 아름다울 때는 꽃봉오리가 반쯤 벌어졌을 때이다. 잎잎이 활짝 벌어지면 오히려 감동이 덜하다. 늙은 가지에 물감으로 점을 찍듯 촘촘히 마주 앉은 봉오리의 순수와 맑음. 구름 하늘과 어우러진 그 오묘한 자태는 아무리 봐도 매력 덩어리이다. 꽃잎 하나하나가 마치 고운 옥돌로 조각해 놓은 듯하다.
산천을 덮고 있는 한 떨기 꽃에서 얻는 감동과 기쁨. 자, 겨울을 이겨내고 그리움처럼 찾아온 봄! 우리 곁에 피어 있는 목련과 이야기를 나눠보자. 나도 저 목련처럼 곱게 피어나 그리운 이에게 꽃향기로 다가가고 싶다. 오늘밤은 잠이 쉬이 올 것 같지 않다.

- 김청하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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