낱말을 설명해 맞추는 TV 노인 프로그램에서
천생연분을 설명해야 하는 할아버지
여보 우리 같은 사이를 뭐라고 하지?
‘웬수’
당황한 할아버지 손가락 넷을 펴 보이며
아니 네 글자
‘평생 웬수’...
- 황성희 시, 「부부」부분 -

아버지도 아니고 오빠도 아닌
아버지와 오빠 사이의 촌수쯤 되는 남자
내게 잠 못 이루는 연애가 생기면
제일 먼저 의논하고 물어보고 싶다가도
아차, 다 되어도 이것만은 안 되지 하고
돌아 누워버리는
세상에서 제일 가깝고 제일 먼 남자

이 무슨 웬수인가 싶을 때도 있지만
지구를 다 돌아다녀도
내가 낳은 새끼들을 제일로 사랑하는 남자는
이 남자일 것 같아
다시금 오늘도 저녁을 짓는다
그러고 보니 밥을 나와 함께 가장 많이 먹은 남자
나에게 전쟁을 가장 많이 가르쳐 준 남자

-문정희 시,「남편」전문 -

천생연분의 동의어가 평생 웬수(원수)랍니다. 모든 세상과 우주는 하나의 원으로 이루어졌다고 믿고 살았던 고대 사람들은 인간의 생, 역시 하나의 원을 그리며 이루어진다고 믿었습니다.
원의 시작점과 한 바퀴를 돌아온 끝점이 동일한 것처럼 우리는 언제나 출발점으로 되돌아온다는 것이지요. 아무리 멀리 달아나봐야 마지막으로 도착하는 곳은 출발과 가장 가까운 평생 원수의 곁입니다.
작은 샘에서 시작한 물이 서로 어우러져 큰 강물을 이루듯이 각자 다르게 태어난 남녀가 몸과 마음이 합일되어 사랑을 하고 함께 걸어가는 것이 부부이지요. 태생이 다른 두 물이 부딪치지 않고 어찌 한 물결로 나아갈 수 있겠습니까? 분명한 것은 나의 웬수가 내가 낳은 새끼들을 제일로 사랑하고 내가 차려준 밥을 함께 가장 많이 먹었다는 사실입니다.
이 지구상 수십억 인구 중에 왜 하필 당신일까요? 그것은 필연입니다. 이미 당신이 태어나기 전부터 그는 당신의 웬수로 태동하여 당신을 사무치게 그리워하며 일상의 작은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평생 웬수, 관자놀이 정맥의 푸른 떨림처럼 오래오래 떨리고 싶은 단어입니다.

- 이병룡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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