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모슬포 항에서 배로 25분 거리. 가파도를 만날 수 있는 시간이다. 차가 필요치 않다. 내 발길 닫는 데로 걷는다 해도 2~3시간이면 족한, 작은 섬. 일부러 재촉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자연스럽게 발길이 서두름을 거부한다. 온 섬은 청보리와 봄꽃으로 그득 차 있다. 봄 햇살이 따뜻하지만 무시로 불어대는 제주 바람은 흐느적 흐느적 청보리를 춤추게 한다. 많이도 불어대는 바람이 힘겨운 것일까? 내륙에서 봤던 보리보다 키가 작다.

요즘 계절에 딱 맞는 가파도(加波島) 가려고 모슬포 항에 도착한다. 배편은 필히 예약해야만 이용 가능하다. 섬까지 25분 거리. 예전 ‘갚아도(가파도) 그만, 말아도(마라도) 그만’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가깝다. 아주 오래전, 섬에서 뭍으로 나오는 배편이 요즘처럼 유용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 섬 사람들은 으레 식량과 생필품을 사러 모슬포항으로 나왔을 것이고 파도가 쎄서 제때 외상값을 값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인심 후한 사람들이 갚아도(가파도)그만, 말아도(마라도)그만 했다는 유래가 전해오는 것이다. 그걸 알려주려는 듯 바람이 세차고 파도는 유난히 거칠다.
가파도는 제주도 본섬과 마라도 사이에 있다. 지도 모양을 보면 마름모꼴, 혹은 가오리처럼 생겼다. 가파도는 상동과 하동, 중동으로 마을이 나뉘어 있지만 굳이 따로 구분하지 않아도 될 만큼 서로 가깝다. 올레 10-1코스로 지정된 코스를 고집하지 않아도 된다. 우측이든, 좌측이든, 어차피 한 바퀴 섬을 돌아보게 된다.
해안 길을 따라 십리 남짓한 4.2㎞ 거리를 에둘러 걸을 필요 없이 마을로 접어드는 길을 택함이 좋다. 그래야 넓은 청보리 밭을 원없이 보게 될테니 말이다. 60만㎡(약 18만평) 넓이의 보리밭 지평선이 그대로 수평선으로 이어진다.
우리나라 유인도 중에서 해발고도가 가장 낮은 섬(20.5m, 마라도는 39m), 가파도에는 사방팔방에 보리밭이 펼쳐진다. 청보리는 바람 탓인지 키가 작다. 예전에는 호프 원료를 사용되는 ‘향맥’이라는 보리를 심었지만, 현재는 일반 보리를 심는다는 게 주민의 말이다.
상동마을 쪽으로 걷다보면 시선은 자꾸 우뚝 솟아오른 산방산과 형제섬에 꽂힌다. 파도를 치듯 일렁이는 키 작은 청보리와 산방산(명승 제77호, 서귀포시 안덕면 사계리)이 어우러져 묘한 조화를 보인다. 실제로 가파도에는 한라산은 물론 송악산, 산방산, 단산, 고근산, 군산 등 제주의 6개 산을 모두 한눈에 볼 수 있는 유일한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나의 발길은 자꾸만 거센 바람에도 미동하지 않은 4기의 풍력단지 쪽으로 향하게 된다. 가는 길목은 봄꽃이 활짝 피어 아름다운 길을 만들어 낸다. 길 양쪽, 밭 가운데의 지석묘가 듬성듬성 눈에 띈다.
선사시대부터 사람이 살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고인돌. 그때도 이곳은 사람들이 살만했었던 듯하다. 제주도에 남아 있는 180여기의 고인돌 중 무려 95기가 가파도에 있다. 시선은 길 끝을 지나 바다를 건너 지척으로 다가서는 국토 최남단인 마라도를 향한다. 가파도는 마라도보다는 2.5배쯤 크다.
마을에는 식당도 있지만 초등학교, 개인 사찰, 교회 등이 있다. 우뭇가사리를 말려 포장을 하는 동네 아낙들을 만나 반갑게 잡담을 나누고 마을을 비껴 가파포구 바닷가로 발길을 옮긴다. 작은 등대 두 기가 햇살에 반짝이는 바닷물과 잘 어울린다.
그리고 눈에 띄는 돌담을 만난다. 바닷가를 바라보고 있는 민가 앞. 눈에 띄는 돌담 앞에 저절로 발길이 멈춘다. 거칠은 제주 돌하고는 다른, 동글동글 돌로 일사분란하게 잘 쌓아 올린 담장이 예술적으로 보인다.
가파도에서는 담을 눈여겨 볼만하다. 이곳 만의 특징이 있다. 대부분 제주도의 돌담은 검은색 현무암인데 이곳은 바닷물에 닳은 마석(磨石)을 쓴다. 바닷 돌 하나하나가 훌륭한 수석이어서 제주도 밖으로 가져갈 수는 없단다. 그리고 이 곳 돌담에는 또다른 특징이 있다.
집 담과 밭 담은 제주도의 다른 지역보다 성글게 쌓는다. 가파도 센 바람이 숭숭 뚫린 구멍으로 지나가기 때문에 잘 무너지지 않는다.
가파도가 얼마나 파도가 심한 것을 알게 해준다. 가파도의 섬 이름처럼 ‘바람의 섬’ ‘풍랑의 섬’으로 불린다. ‘정이월 바람살에 가파도 검은 암소뿔이 휘어진다’는 속담이 있을 정도다. ‘파도가 더해진다’는 그 이름이 괜희 붙은 것 아닌 듯하다.
또 이곳을 1653년 네덜란드인 하멜 일행의 배가 난파된 곳으로 추정하는 학자들도 있다. 네덜란드 사람 하멜이 조선에서 14년 동안 억류돼 있다가 탈출한 뒤 귀국해서 쓴 ‘하멜표류기’에 등장하는 ‘케파트(Quepart)’라는 지명이 가파도라고 추정한다.
걷다가 담장 앞에서 풀을 베는 70세가 훌쩍 넘은 할아버지를 만난다. 1970년대 부촌으로 유명했던 섬은 지금은 젊은이는 떠나고 주로 노인들만 남았다.
봄철이면 관광객들이 물밀 듯 몰려 오지만 주민들은 늘 그 자리를 지키며 살아간다. 바다와 육지에서 먹거리를 만들어 낸다. 어부들은 고기를 잡고 해녀들은 자연산 문어, 소라, 전복, 미역, 톳, 성게, 보말 등을 채취한다. 보리와 고구마가 주 특산물이지만, 고구마 농사는 돈이 되지 않았다고 불평을 늘어 놓는 것이 이 섬의 현실인 것이다.
그런 속살은 어찌하든 가파도의 봄은 화려하다. 심하게 불어대는 바닷바람에 몸을 맡기고 제 멋대로 한들거리는, 넓은 보리밭 사이를 걷는 재미. 천천히 걷지 말라해도 절로 여유로워지는 섬. 그곳은 이 봄과 너무나 잘 어울려 있다.

여행정보
○ 주소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대정읍 가파리, 문의 : 가파리사무소 : 064-794-7130, 대정읍사무소 : 064-760-4081~2
*모슬포 ↔ 가파도 배편정보
평일 7회(09:00, 10:00, 11:00, 13:00, 15:00, 16:00), 주말과 휴일 8회(12:00 증선)
○ 운항요금 : 21삼영호 : 왕복 1만원, 삼영호 : 왕복 8천원 / 문의 : 064-794-3500 http : //www.wonderfulis.co.kr / 폭풍주의보가 내리면 배가 뜨지 않으므로 미리 배 시간과 일기예보를 확인해야 한다.

○ 맛집 : 용궁식당(064-794-7083, 정식)이 가장 유명하다. 민박도 가능하다. 그 외 춘자네식당(064-794-7170), 해녀촌(064-794-5745), 바다별장(064-794-6885), 올레길식당(064-792-7575)등이 있다. 숙박은 민박을 하면 된다.

■글·사진 이신화 http://www.sinhwad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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