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에 대한 흠모가 작품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닌, 예술가의 파란만장한 삶에 더 많이 기대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된다. 거기엔 이기적 심리가 드리워진다. 나는 도시의 아파트에서 안온한 삶을 살고 있으면서, 언제 찾아가든 고향의 향수를 느낄 수 있도록 누군가는 불편한 초가집과 기와집, 농토를 지키며 살아주었으면 싶은 것. 같은 맥락으로, 나의 삶은 고생도 가난도 없는 평탄하고 유복한 것이어야 하지만, 예술가라는 짐을 지기로 한 이들은 평생 곤궁 속에 비극적 삶을 살면서 위대한 작품까지 생산해주었으면 싶은 것 말이다. 그래야만 내가 직접 겪지 못한 인생의 뒤안길, 스산함이 배어난 작품을 즐기다 무임승차로 성불에까지 이를 테니 말이다.
아시아에서는 처음으로 한국에서 열린다는 ‘알리스 닐 개인전’(6월 2일까지, 갤러리 현대)을 보면서도 위와 같은 생각이 들었다. 자신을 ‘영혼의 수집가’로 불렀다는 20세기 미국을 대표하는 인물화가, 1960년대에 유행했던 미니멀리즘이나 1960~70년대를 휩쓴 개념주의와 같은 화단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고 자신의 길을 갔던 여류 화가, 영국의 루치안 프로이트와 쌍벽을 이루는 인물화가, 여성 예술가의 선구자와 같은 평가에도 불구하고, 소설이나 영화보다 극적인 그녀의 삶에 먼저 관심이 갔기 때문이다.
펜실베이니아에서 태어난 엘리스 닐(Alice Neel, 1900년-1984년)은 부모의 지원 덕에 어릴 때부터 미술 교육을 받을 수 있었고, 1921년 필라델피아 디자인 여학교에 들어간다. 그 때 쿠바에서 온 화가 카를로스 엔리케즈와 사랑에 빠져 1925년에 결혼을 하고 하바나로 간다. 맨해튼만한 크기의 농장을 지닌 갑부 시댁에서 닐은 부르조아 계층의 젊은 전위 작가, 미술가, 음악가 등을 알게 되는 한편, 이런 환경은 닐로 하여금 정치의식과 평등 의식에 눈뜨게 한다.
첫 딸을 디프테리아로 잃은 충격은 닐의 그림에 어두움을 드리웠다. 곧바로 둘째 딸 이자베타를 낳았지만, 하바나로 돌아가기를 거부한 닐을 두고 남편은 딸만 데리고 귀향함으로써 이들의 결혼은 끝나게 된다. 닐은 신경쇠약으로 두 차례 자살을 기도하고 정신병원서 일 년을 보냈다. 엔리케즈는 쿠바의 아방가르드 운동을 대표하는 화가, 일러스트레이터, 세 권의 소설을 쓴 작가로 기록되고 있다.
닐은 가족, 지인은 물론 가난한 흑인과 히스패닉계, 뉴욕 시장, 화가 앤디 워홀 등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다양한 직업군의 인물 초상화를 남겼다. 충분한 대화를 나눈 후 그림을 그렸다는데, 특히 여성의 내면 통찰에 뛰어난 것으로 평가받는다. 가난 속에서 쉬지 않고 그림을 그렸지만, 여성이라는 이유로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했던 닐은 페미니즘의 대두와 함께 비로소 조명받기 시작했다. 1970년에 타임지 표지에 페미니스트 운동가 케이트 밀레의 초상화가 실렸고, 1974년 뉴욕 휘트니 미술관에서 첫 회고전이 열렸다. 1976년엔 미국 예술문예아카데미의 명예회원으로 추대됐으며, 1979년엔 대통령 지미 카터로부터 National Women’s Caucus for Art상을 받았다.
‘알리스 닐 개인전’은 닐의 작품 세계를 조망하기엔 턱없이 부족한, 1942년부터 1981년까지의 작품 15점이 선보일 뿐이다. 특징을 잡아 빠른 속도로 스케치한 듯한 인물과 과감하게 생략하거나 간소화한 배경에도 불구하고 인물의 내면과 시대 분위기가 읽히는 그림을 그린, 손끝에 모든 신경이 가있는 화가라는 말을 들었던 닐. 북유럽과 스칸디나비아 미술과의 교감과 스페인 회화의 어두운 분위기에 공감하며 초상화 외에 정물화, 풍경화도 많이 남긴 닐의 작품 전반은 비치된 화집과 상영 중인 다큐멘터리가 더 잘 말해주는 듯하다.
그럼에도 진품을 대하는 감동은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다. 한 벽면에 한두 점씩, 빈 공간이 많은 덕분에 그림 속 인물과 그들이 포즈를 취할 당시의 사연에 빨려 들어갈 수 있는 장점이 있기도 하다.

- 옥선희 대중문화칼럼니스트 eastok7.blog.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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