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르르…’미끄러지듯 KTX는 플랫폼을 빠져나갔다. 간밤에, 창(窓)을 뒤흔드는 세찬 비바람은 변덕스런 꽃샘추위였을까? 길 나서려는 들뜬 기분에, 잠마저 설치게 했다.
열차 창밖의 풍광(風光)은 한결 따스하고 싱그러워 보였다. 한 뼘씩 자란 보리며, 나뭇가지마다 뾰족이 내민 연둣빛 잎새들, 띄엄띄엄 나타나는 산자락의 진달래, 벚꽃, 여기저기 쟁기질하는 농부들의 가벼운 손놀림에서 봄은 힘차게 달려가고 있었다.
창밖으로 펼쳐지는 계절의 변화를 즐기는 사이 열차는 어느새 신경주역에 닿았다. 4월의 벚꽃 축제를 보려는 꽤 많은 승객들이 썰물처럼 역사(驛舍)를 빠져나갔다. 고적(古蹟)을 경유하는 시내버스에 몸을 실었다. 차창 밖 양쪽 가로수 길은 온통 만개한 벚꽃으로 터널을 이루어 화사했다.
보문단지 호숫가의 만개한 벚꽃 산책길은 밝고 수려하고 향기로웠다. 파란 하늘 사이로 은하수를 뿌려 논 듯 반짝이는 벚꽃 편린(片鱗)은 눈을 시리게 만들었다. 많은 인파들이 물결처럼 걸으며 피어나는 웃음과 도란거리는 얘기들로 인해 3만여 그루의 벚꽃 길은 ‘봄의 향연’이었다. 너른 동산에 거대한 흰 실크천이 덮인 듯 온통 벚꽃 세상으로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운 벚꽃세상 경주를 뒤로하고 묵호행 영동선 열차에 올랐다. 강릉을 잇는 이 구간은 산세가 험난하고 계곡도 길고 아름다워서 한국의 ‘그랜드 캐년’이라 불린다고 한다.
‘철령 높은 봉에 쉬어 넘는 저 구름아…’옛 시인이 읊조린 시한수가 번득 스친다. 쟁반 같은 흰 구름 한 조각 봉우리에 한가로이 걸쳐있고, 산허리를 맴돌기만 하는 새들이 태백 준령임을 말해 준다.
기차는 떨어질세라 산허리를 바싹 감아 안 듯 덜컹거리며 지그재그 준령을 오른다. 손 내밀면 금방이라도 손에 닿을 듯 다가선 기암괴석을 응시하며 영겁의 세월을 반추해 본다. 발아래엔 굽이굽이 돌아가는 계곡의 청량한 물소리, 양지 바른 기슭에 옹기종기 놓여 있는 통나무 벌통, 간간이 나타나는 산촌 마을풍경 등, 5시간의 여정이 지루한 줄 모르고 지나갔다. 동백산과 도계역 사이에는 13년 만에 공사를 마무리하고 지난해 운행을 시작했다는 국내에서 두 번째로 긴 17.8km의 ‘솔안 터널’이 있다. 전엔 이 구간에 강삭으로 차량을 끌어 올리면서 운행하는 강삭철도가 있었고, 승객은 1km 정도를 걸어서 올랐다는데 전설로 남게 됐다.
태백지역은 탄광이 즐비하여 한 때 우리나라 에너지의 ‘주탄종유’(主炭從油) 정책을 뒷받침하는 炭의 주요 공급원이었던 곳이다. 지금은 소규모 흔적만이 명맥을 이어가고 있었다. 도계 쪽 산자락에 ‘石公’ 로고가 희미하게 남아있는 오래된 많은 아파트만이 이곳이 융성했던 광부들의 보금자리였음을 웅변하고 있었다.
묵호항은 바다를 안고 초승달처럼 굽은 등 뒤로 평화롭고 아늑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묵호역에서 나와 오른쪽 도로를 따라 1.5km쯤 걷다보면 항구 끝부분 왼쪽 언덕바지에 담벼락이 알록달록한 등대 담화 마을, 논골 담 길로 이어진다. 한 두 사람이 겨우 지나갈 정도의 경사가 급한 오르막 길, 옛날 어려웠던 시절 수산물을 말리기 위해 조금씩 언덕으로 언덕으로 오르게 되다보니 형성 되었다는 산동네 마을이다. 좁은 길가 동화 속 마을처럼 작은 집들이 저마다 개성 있는 그림이나 장식으로 우리를 맞는다.
웃음이 절로 나는 그림도, 앙증맞은 새집도, 손바닥만한 우편함도, 뱅글뱅글 잘도 돌아가는 바람개비도 모두 어린 시절로 잠시 되돌아가게 만든다. 드라마(찬란한 유산) 속 주인공처럼 ‘출렁다리’도 건너고 꼬불꼬불 오르막을 오르면 탁 트인 바다와 묵호항 시내를 한 눈에 바라볼 수 있는 바닷가 언덕 위에 육중한 흰 색의 묵호 등대가 반긴다.
등대에서 비춰주는 황홀한 야경, 동해에서 맞이하는 일출의 경험도 잊지 못할 추억이다.
새벽엔 다행히 바람은 잦아들었고, 일층 카페 문을 열어주며 따끈한 국화꽃잎차와 함께 전기난로도 켜 주는 카프리 펜션 여주인의 배려로 추위 걱정 없이 일출을 볼 수 있었다.
역시 항구에선 활기찬 삶의 현장을 느낄 수 있는 곳이 왁자지껄한 수산시장 구경이다. 갓 잡은 생선과 제철 대게를 흥정하고 식당에서 맛보는 경험도 또한 즐거움이었다.
귀경하는 열차 길, 여행은 곧 길과 통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닿는 곳마다 보고, 느끼고, 맛보고, 함께 어울리며, 얘기들을 나누다 보면 미래로의 길로 통하는 지혜가 트이지 않을까?
아내와 함께 배낭하나 덜렁 메고 훌쩍 떠난 길이었지만 마음이 넉넉해져 돌아온 2박3일이었다. 

저작권자 © 중소기업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