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빙기를 지나고 봄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4월, 당진 장고항 어부들의 몸짓이 부산하다. 실치 잡이를 해야 하는 계절이기 때문이다. 실치가 적게 나올 때는 하루에 한 번 정도 그물을 올리지만 많이 날 때는 수시로 바다에 나가 바쁜 작업을 해야 한다. 흰 몸에 눈 점 하나 있는, 애써 눈여겨 봐야 할 정도로 작은 물고기인 실치가 작은 몸집 흐느적 거리면서 장고항 앞바다를 회유한다. 실치는 장고항의 봄 전령사가 된다.

4월 어느 날, 장고항을 찾는다. 해돋이를 보는 것으로 하루 해를 시작하려 한다. 오전 6시가 채 못돼 부스스 일어나 장고항 우측 끝자락의 노적봉과 촛대바위가 잘 보이는 위치를 찾는다. 마치 뫼산(山) 형태의 기암은 장고항의 지킴이다. 오랫동안 먼 바다에 조업 갔다오는 어부들의 안도의 버팀목이 되었을 것이다. 이 계절, 기암 사이로 멋지게 떠오르는 해돋이를 기대하진 않는다. 단지 장고항을 대변해주는, 육지 끝자락에 있는 모습을 확인해 보고 싶었을 뿐이다. 물이 빠져 갯벌이 다 드러나는 서해에서 바라보는 일출. 동해에서와는 사뭇 느낌이 다르다.
아침 햇살은 빠르게 사위를 밝게 해준다. 서둘러 장고마을로 들어선다. 장고항은 ‘지형이 장고의 목처럼 생겼다’해서 장고목이라 불리다가 후에 장고항 마을이라 개칭됐다. 그 외에도 가낭골, 당산 마을이 있지만 사람들은 바닷가 마을을 가장 좋아한다. 서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바닷가 마을인 장고항이 특히 유명해진 것은 실치 덕분이다.
장고항 사람들은 1970년대 초, 실치잡이가 본격화돼 다들 실치포를 말렸다고도 한다. 실치잡이가 성행할 때는 150여 가구가 소위 멍텅구리배로 불리던 무동력 중선으로 실치잡이를 해왔다. 농사지어서는 못시켰던 자식교육을 실치를 잡아서 시킨다고 할만큼 이 지역 어민들의 주 수입원이었다. 1990년대 들어서는 연안에서의 실치잡이 어선은 자취를 감추게 된다. 지금은 인근 앞바다에서 개량 안강망 그물로 실치를 잡는다. 그 즈음부터 실치가 본격적으로 횟집에서 회로 팔리기 시작하게 된다. 보릿고개에 배고픈 어부들이 실치 한 사발을 떠서 초고추장이나 된장에 비벼먹었던 유래가 현실로 이어진 것이다. 2000년 초부터는 장고항 실치회 축제를 만들어 ‘실치회의 원조 고장’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이제는 ‘당진 8미(味)’중 하나로 꼽히는 실치회를 먹어야 할 시간이다. 실치회 한 접시를 시킨다. 요리는 반으로 나뉘어져 있다. 아주 작은, 흰색의 물고기가 무더기로 뒤섞인 채 깨소금, 참기름, 파 등 양념이 흩뿌려져 있다. 또 오이, 깻잎, 쑥갓, 당근 등 갖은 야채에 고추장 양념으로 무쳐냈다. 실치와 야채를 함께 쓱쓱 버무려 입에 넣기만 하면 된다. 미끄러지 말라고 준 나무 젓가락에 실치회를 집어 한입 먹는다. 비린 맛이 없고 고추장 양념으로 무쳐낸 야채 맛이 어루어져 입안이 상큼해진다. 작은 물고기라서 씹히는 맛 없이 그저 살살 녹아드는 듯하다. 아욱을 넣어 끓여낸 고소한 실치국에 실치전, 실치 계란찜까지 먹으니 배가 부르다. 그런데 궁금증은 아직 남아 있다.
도대체 실치란 무엇일까? 실치를 통상 뱅어라고 알고 있었는데 자료를 찾아보니 ‘베도라치’라고 한다. 서해에서는 흰베도라치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데 실치는 ‘흰베도라치 새끼’란다. 그래서 뱅어 보다는 차라리 실치라고 부르는게 맞다는 것이다. 베도라치라는 그 이름을 외우려면 시간 깨나 필요하겠다.
실치는 대개 3월 중순쯤 처음 잡히기 시작한다. 길이가 2∼3㎝정도였다가 4∼5㎝정도로 커지고, 5월 초순을 넘으면 10㎝ 크기의 성어로 자란다. 10월부터 알이 배기 시작하여 겨울철인 11~12월에 연안을 벗어나 먼 바다로 나가 산란한다. 수온이 낮아서 알에서 깨어나는 부화기간이 한 달 정도 길게 지속된다. 1월이 되면 알에서 깨어나 2월 즈음 서해 중부 보령 앞바다에 넓게 퍼져 있다가 3월에는 이곳 장고항으로 들어오는 것이다. 실치회를 먹을 즈음인 3~4월에는 크기가 5㎝가 넘지 않아 실오라기처럼 눈에 잘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실치라고 부르는 것이다. 성어가 돼도 살은 여전히 투명하다. 하지만 죽으면 흰색으로 변한다. 다 자란 어미는 암초지대에 살며 3살까지 산다.
실치 잡이는 낭장망(정치망이라고도 한다)을 이용한다. 그물의 입구 양쪽으로 기둥을 세워 수면 위로 약간 떠 있게 고정을 하고, 물고기가 들어와 모이는 그물의 한쪽 끝은 바닷물 속에 내려져 있는 구조다. 긴 자루 모양의 그물로 물살이 센 바다에 맞는 어구다. 서해와 남해의 연안에서 흔히 쓰는 작업법이다.
첫 그물에 걸려드는 실치는 너무 연해서 회로 먹기는 어렵다. 4월 초순이 되면 적당히 커져서 횟감으로 적당하다. 실치는 6월 말까지 잡히지만 4월 중순이 넘으면서 뼈가 굵어져 제 맛을 잃는다. 그래서 실치회를 먹을 수 있는 기간은 약 한달로 눈깜짝할 새다. 실치는 성질이 급해 잡아 낸지 얼마 가지 않아 죽는다. 당연히 먼 곳까지 운반할 수 없기에 산지에서나 싱싱한 회를 먹을 수 있는 것. 그래서 이 즈음에 장고항에서는 실치회를 먹으려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다. 이후부터 잡히는 물고기는 실치포를 만든다. 멸치처럼 데쳐서 말린다. 특히 실치포는 칼슘이 풍부한 건강식이다.
집에 돌아와 장고항에서 구입한 실치포로 밑반찬을 만든다. 간단한 요리법이다. 프라이팬에 기름을 두르고 포를 가위로 먹기 좋게 잘라 구워낸 것이 전부다. 노릇노릇 먹음직스러운 실치포는 입안에서 바삭바삭 과자처럼 부서지면서 고소함을 느낄 수 있다. 그런데 과장없이 놀라운 맛이다. 이렇게 맛이 좋았었나 싶을 정도다. 장고항의 바다 향기가 집안까지 이어지는 듯하다.

■여행정보
○ 찾아가는 길
송악IC-38번 국도를 타고 대산방향으로 진행·석문방조제를 지나 615번 지방도로-5㎞ 정도 직진·장고항으로 우회전
○별미집 
용왕횟집(041-353-0255), 고향나루 횟집(041-353-2721) 등을 비롯 다수 식당이 있다. 실치회 등을 즐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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