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일모직이 역사 속으로 사라지던 순간이었다. 지난달 31일 제일모직과 삼성SDI가 합병을 결의했다. 삼성SDI가 신주를 발행해서 제일모직 주식과 교환하는 방식이었다. 사실상 삼성SDI가 제일모직으로 흡수합병되는 셈이다. 제일모직과 삼성SDI는 7월1일까지 최종 합병을 마무리한다는 계획이다.
제일모직은 이미 지난 12월1일을 기점으로 패션사업부문을 삼성에버랜드에 양도했다. 원래가 제일모직 매출에서 패션부문이 차지하는 비중은 30% 정도였다. 제일모직의 주력은 폴리카보네이트나 편광필름을 생산하는 화학 소재 부문이다. 그래도 패션사업부문은 제일모직의 상징이었다. 패션을 포기하면 제일모직은 제일화학이 된다.
제일모직은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가 1954년 설립한 기업이다. 1950년대만 해도 한국이 의복의 원단을 직접 생산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에 가까웠다. 반도체를 생산하는 일처럼 무모한 도전이었다. 이병철 창업주와 제일모직은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덕분에 제일모직은 오랜 세월 삼성그룹의 모태이면서 삼성의 인재풀이 됐다. 제일모직은 창업주를 지근 거리에서 모신 역전의 용사들이 모인 조직이었다.
이학수 삼성물산 고문이 대표적인 제일모직 출신이다. 이학수 고문은 1971년 제일모직 대구공장 경리과 사원으로 입사했다. 비서실과 구조조정본부의 요직을 거쳤다. 이학수 고문은 이건희 회장이 외환위기를 거치며 부활시킨 구조조정본부를 이끌었다. 사실상 삼성그룹의 2인자였다. 이때부터 제일모직 라인 재무통들이 삼성그룹의 막후 실세로 떠오르게 됐다.
이건회 회장은 “1명의 천재가 10만명을 먹여살린다”는 천재론을 설파했다. 가전의 윤종용, 전자의 이윤우, 반도체의 황창규, 정보통신의 진대제, 휴대폰의 이기태 같은 인물들을 중용했다. 정작 이들은 최전선에서 전투를 수행하는 장수들이었다. 후방 최고사령부에는 늘 제일모직 라인들이 있었다. 이학수 고문은 이건희 회장에서 이재용 부회장으로 이어지는 경영권 승계 작전을 입안했고 실행했고 성공시켰다.
이른바 제일모직 라인들을 승승장구하고 있었지만 정작 제일모직은 그렇지 못했다. 삼성그룹의 무게중심은 전자와 화학 같은 중후장대 산업으로 옮겨간지 오래였다. 제일모직의 패션사업이 그룹 매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왜소해져버렸다. 삼성그룹은 제일모직에 전자재료사업을 맡긴다. 2000년엔 아예 증권거래소에 화학 분야로 업종을 변경 등록한다. 삼성전자가 성장하면서 제일모직의 전자재료 부문의 매출도 커졌다. 덕분에 제일모직은 대외적인 위상을 유지할 수 있었다. 삼성그룹의 모태이며 삼성조직의 척추를 이루는 제일모직 라인의 고향이라는 상징성에 대한 배려였다.
정작 대내적으로 제일모직은 패션과 화학이라는 이질적인 두 사업이 한 지붕 두 가족처럼 동거하는 기업이 됐다. 한편에선 밀라노 패션쇼 얘기를 하는데 다른 한 편에선 독일 OLED 기업을 인수하는 식이었다. 어색했지만 그래도 제일모직이었다. 사실 제일모직의 실질적인 위상은 지분 관계에서 나왔다. 제일모직은 삼성엔지니어링의 최대주주이고 삼성석유화학의 대주주다. 삼성엔지니어링은 삼성물산과 함께 삼성그룹 건설사업의 주춧돌이다. 삼성석유화학은 삼성그룹 화학사업의 고임목이다. 제일모직은 지분 관계상 삼성그룹의 두 기둥인 건설과 화학을 오랫동안 지배해오고 있었다. 제일모직은 분명 삼성의 뿌리였다.
이제 제일모직이 해체됐다. 이미 삼성그룹 안에서 제일모직 라인은 제일모직보다 먼저 사라졌다. 2010년 11월 이학수 고문이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면서 이른바 제일모직 라인들도 동반 퇴진했다. 제일모직의 옛 상징성을 강조하는 목소리도 그만큼 줄어들었단 얘기다.
이젠 삼성전자 라인만 있을 뿐이다. 제일모직이 창업주 이병철 시대를 상징하는 기업이었다면 삼성전자는 2대 이건회 회장 시대를 대표하는 기업이다. 삼성그룹의 2인자라고 할 수 있는 최지성 미래전략실장은 삼성전자 CEO출신이다. 최지성 부회장은 삼성그룹 전체에 삼성전자 DNA를 확산시키고 있다. “삼성그룹은 삼성전자와 삼성후자로 나뉜다”는 얘기까지 나올 정도다. 삼성전자가 제일모직의 권위와 법통을 이어받았단 뜻이다. 그리곤 제일모직이라는 이름까지 반세기만에 역사속으로 사라지게 됐다. 삼성에버랜드가 사명을 제일모직 패션 부문과 제일모직 리조트 부문으로 바꿀 거란 얘기도 나온다. 간판만 있다. 조직은 없다.
제일모직 해체는 삼성그룹 3세 승계를 위한 중요한 포석이다. 제일모직은 삼성그룹 건설과 화학 부문의 연결고리다. 제일모직을 통해 삼성SDI가 보유하게 된 삼성엔지니어링 지분이 삼성물산 쪽으로 이동할 공산이 크다. 제일모직의 화학 쪽 지분 역시 결국 삼성물산으로 이동할 가능성이 높다. 삼성물산이 삼성의 건설과 화학 쪽 지주사가 된다.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이 삼성물산의 주인으로 등극하면 3세 분할이 마무리된다. 결국 삼성은 이재용 부회장의 전자, 생명과 이부진 사장의 건설, 화학으로 재편된다. 이 모든 게 제일모직의 해체에서 시작된 일이다. 뿌리는, 흙으로 돌아간다. 삼성의 뿌리가 삼성 미래의 밑거름이 됐다.

- 글 : 신기주(경영전문칼럼니스트 / 「사라진 실패」 의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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