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0년의 역사를 품은 도시 서울에는 기나긴 세월의 이야기가 오롯이 담겨 있다. 물론 과거를 느낄 수 있는 건물은 고궁 정도로 모든 것이 변했지만 서울의 지명(동이름)에서 전설과 사연을 엿볼 수 있다. 1000만이 넘는 인구가 모여 사는 거대 도시 서울의 각 동에는 어떤 사연이 담겨 있을까. 서울 곳곳의 유서 깊은 지명을 살펴 역사를 들여다보자.

역삼동·역촌동·구파발 등 말 지명 많아
자동차가 들어오기 이전 서울의 주요 교통수단은 단연 말이었다. 따라서 서울에는 말과 함께했던 우리 삶의 흔적들이 여기저기 남아 있다. 서울에서 전국으로 궁궐의 소식, 명령 등을 보내던 파발마와 관련된 역삼동, 역촌동, 구파발을 비롯해 말죽거리, 마장동 등이 대표적이다.
권상우 주연의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에 등장하는 말죽거리는 서울 서초구 양재역 사거리 일대를 가리킨다. 옛 지도에 마죽거리(馬竹巨里), 마죽거(馬竹巨) 등으로 표기돼 있는 이 지역은 과거 서울 도성에서 삼남(충청, 전라, 경상)으로 출발하는 지점에 위치해 누구나 거쳐야 하는 교통 요충지였다. 따라서 도성으로 입성하는 사람도, 삼남지방으로 떠나는 사람도 이곳에서 여장을 풀고 말에게 말죽을 먹이는 주막이었기에 ‘말죽거리’라는 이름이 붙여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 1624년 ‘이괄의 난’ 때 피난길에 오른 인조 일행이 허기와 갈증에 지쳐 이곳에서 급히 쑨 팥죽을 말 위에서 먹고 부랴부랴 과천으로 떠났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도 있다.
성동구 마장동은 조선 초기 말을 기르던 양마장이 있었던 지역에서 유래했다. 양마장은 도읍 한양의 소식이나 명령 등을 전국으로 보내는 ‘파발마’를 기르고 관리하던 곳. 제주에서 온 말 중 암컷은 광진구 자양동에서, 수컷은 마장동의 말 목장에서 길렀다고 한다. 당시 풀밭이던 이곳은 현재 고깃집이 밀집해 있다.
화양동의 옛 이름은 모진동으로 조선시대 때 이곳엔 양마장이 있었다. 지금의 건국대학교 후문 근처에서 방목해 키우던 말이 실족해 수렁에 빠져 죽으면 이 마을 여인들이 수렁 위에 널빤지를 놓고 들어가 죽은 말을 건져내 그 고기를 나눠 먹었다. 그 모습을 본 인근 마을 주민들이 모진 여인들이 사는 마을이라 하여 ‘모진동’이라 불렀다고 전해진다.
직장인, 대학생 사이에 ‘맛집 골목’으로 유명세를 떨쳤던 서울 종로구 피맛골도 말과 관련된 지명이다. 조선시대 서민들이 종로를 지나다니는 고위 관리들의 말을 피해 다니던 길이라는 뜻의 ‘피마’에서 유래했다. 백열등 아래 비릿하고 고소한 ‘고갈비’에 소주잔을 기울이며 인생사 고뇌를 털어내던 사람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이태원의 두 얼굴 지명 유래서도 나타나
왕십리는 이성계가 무학대사, 정도전과 함께 조선의 도읍으로 정하려 했던 지역이다. 그런데 ‘십 리를 더 가라’는 한 노인의 가르침을 받아 경복궁을 궁터로 잡았다. 당시 드넓은 벌판, 살곶이벌을 아우르는 마장이 있던 곳은 그래서 왕십리가 됐다. 실제로 왕십리와 경복궁은 십 리 떨어져 있다. 병자호란,  일제강점기, 한국전쟁 등 우리 역사의 굵직굵직한 위기를 거치며 왕십리는 금형·자개·봉제공장들이 즐비한 공장골목 지대를 형성했다. 이후 서민의 고달픔을 잊게 하는 값싼 곱창집들이 들어서면서 현재 왕십리의 대표적 마루지기가 됐다.  
서울에서 외국인이 가장 많이 거주하고 외국인이 가장 많이 찾는 곳 이태원. 그래서 이곳엔 동서양의 문화가 공존하지만 우리 민족의 한 서린 역사도 품고 있다. 이태원이란 지명의 유래는 임진왜란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이 지역 절인 ‘운종사(雲鍾寺)’ 여승들이 왜군에게 겁탈 당했다고해 ‘다를 이(異)’, ‘태아 태(胎)’ 자를 쓴다는 가슴 아픈 이야기가 전해온다. 배나무가 많아 ‘참배 리(梨)’ 자를 썼다는 설도, 옛날 고지도상 ‘두 이(二)’ 자를 썼다는 주장도 있다. 이태원의 ‘이’가 뜻하는 정확한 의미를 알 순 없지만 이태원이 ‘두 얼굴’을 지녔다는 사실은 인정해도 될 듯하다.
한때 오렌지족들이 “야, 타!”를 외치던 강남의 대표적 부촌 압구정 역시 역사적으로 유래 깊은 동네다. 어린 조카 단종을 폐위시키고 조선 제7대 왕에 오른 수양대군(세조)의 계유정란과 밀접하다. 계유정란의 일등공신이자 핵심 인물인 한명회의 호가 바로 압구(狎鷗)다. ‘압구’란 ‘갈매기와 친해 가깝다’라는 의미로 욕심 없이 자연과 동화된다는 뜻. 세조를 왕으로 추대한 후 영의정을 지낸 한명회가 노년에 권좌에서 물러나 갈매기와 벗하고 싶다고 지은 정자가 압구정이다. 당시 압구정은 한강변의 언덕 위에 자리해 운치는 말할 것도 없고 어마어마한 규모로 명나라 사신들이 조선땅에 오면 그곳에서의 연회를 큰 영광으로 여길 정도였다고 한다. 역사를 보는 눈에 따라 ‘공신’과 ‘역적’을 오가는 한명회라는 인물처럼 오늘날의 압구정도 극단의 모습을 띄고 있다. 
     
- 글 : 노경아 jsjysh@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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