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중구로 떠나는 커피 역사 기행

▲ 고종이 커피를 마시기 위해 지은 ‘정관헌’

이제 커피는 우리 일상에서 빼놓을 수 없는 필수 음료가 됐다. 수준 또한 높아졌다. 커피 콩을 직접 볶고 커피를 내리는 전문 바리스타가 있는 곳을 발품팔아 찾아다니는 마니아들도 흔하다.
이렇듯 대중 속으로 깊이 자리를 잡은 커피는 우리나라에서 어떻게 시작됐을까? 그 의견은 분분하지만 조선시대 고종에서 비롯됐다는 것이 정설이다.

한국인 첫 커피 마니아…고종 황제
고종과 커피 이야기를 풀어내려면 일단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가게 된 역사적인 이야기부터 파고 들어가봐야 할 것이다. 경복궁 내 향원정 바로 뒤에는 ‘건천궁’이 있다. 이곳은 고종 32년(1895) 일본 자객들에 의한 명성황후 시해사건이 난 현장이다. 바로 ‘을미사변’이다. 사건 이후 신변위협을 느낀 고종과 왕세자는 건양 1년(1896) 2월 11일, 러시아 공관으로 옮겨 간다. 이 사건을 ‘아관파천’이라고 한다. 왕궁을 떠난 후 약 1년간 러시아 공관에 머물게 된다. 
고종이 러시아공관에 머무는 동안 모든 음식물은 외부에서 조달했다. 그 업무는 손탁(Antoniette Sontag, 1854~1925)이 맡았다. 손탁은 1885년 러시아 공사 베베르를 따라 조선에 첫발을 디뎠다. 그녀는 알자스로렌 지방 출신의 독일인으로 베베르의 처형이었다. 그녀는 용모가 아름답고 태도가 세련됐으며 머리가 좋고 수완이 뛰어난 여성이었음을 알게 한 기록들이 남아 있다.
개화기시절 조선정부는 미국, 영국, 독일, 러시아 등과 근대적 외교조약을 체결한 후 궁중에서 외교사절을 접대하는 일이 많아지자 외국어에 능통한 여성이 필요하게 됐다. 이에 베베르 공사의 추천으로 손탁은 궁내부 소속의 관원이 돼 외국인 접대를 맡게 됐다. 이후 손탁은 외국인을 위한 왕실 연회를 주관하면서 국내외 귀빈들에게 서양 요리를 대접했다. 청일전쟁 이후 일본의 강압에 의해 친일정부가 들어선 이후 고종과 명성황후는 손탁이 직접 조리하는 서양요리만을 안심하고 먹었을 정도로 그녀를 신임했다. 고종에게 최초로 커피를 볶아 마시게 했던 이도 손탁이다.
고종은 러시아 공관에 머물면서 빠르게 적응했다고 한다. 공관의 외국인들은 으레 식후에는 ‘커피’를 마셨다. 고종은 까만 물(커피)을 마시면 서양인처럼 키도 커지고 모양새도 바뀐다 생각하고 마시기 시작했다고 전한다. 1년간 마신 커피의 맛에 서서히 중독된 고종은 경운궁으로 돌아와서도 커피를 마실 수 있는 공간이 필요했고, 사랑방 ‘정관헌’을 짓게 된다. ‘고요히 바라보며 머무는 정자’라는 의미의 정관헌은 고종이 커피를 마시기 위해 즐겨 찾았던 장소다. 커피 뿐 아니라 다과 등을 즐기던 공간으로도 활용됐다. 당시 다과로는 샴페인, 프랑스산 포도주, 영국산 비스켓, 영국산 빵, 마닐라산 담배 등이었다고 한다. 외국 문물이 밀려오던 때임을 감안해야 할 것이다.
정관헌에서의 커피 일화가 재미있다. 고종이 으레 식후에 커피를 마시자 신하들도 궁금해 했다. 그래서 고종은 가까운 신하에게 커피를 선물했다. 그들이 커피를 받기는 했으나 먹는 법을 알리 만무했다. 그래서 밥상을 차려 놓고 국 대접에 풀어 먹었다. 커피의 한자를 풀어 중국식으로 ‘가비(加比)’라는 말도 전해 오지만 그들은 알리 만무했다.
그래서 이름을 자기 식대로 지었다. ‘서양인들이 즐겨 마시는 국’이라는 의미로 ‘양탕국’이라고 불렀다. 커피를 마시고 나서는 힘이 솟구쳤다. 커피의 카페인 탓에 밤에 잠이 안 오니 새끼 꼬는 일을 몇 배나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어쨌든 정관헌은 침전인 함녕전이나 공식 행사를 위한 중화전, 그 뒤켠에 있는 즉조당, 준명당, 석어당으로 쉽게 건너갈 수 있는 위치에 있다. 사바친이라는 러시아인 건축가가 지은 정관헌 건축양식이 독특하다. 지붕과 기둥만 있다. 가운데 탁자가 놓여 있지만 사방이 트여 있어 바람을 가릴 수 없다. 또 정관헌은 영화 <가비>의 배경이 되었다.

국내 최초의 대중 커피숍…‘손탁호텔’
손탁은 1895년 고종으로부터 경운궁에서 도로 하나 건너에 있는 땅과 집을 하사 받았다. 정동 29번지 소재 왕실 소유의 가옥 및 토지 3900㎡(1184평)다. 덕수궁을 나와 이화여고로 가면 ‘손탁호텔 터’라는 돌 표지석을 만나게 된다. 주차장 한 모퉁이에 돌로 된 작은 표석이 놓여 있다. “한말에 러시아에서 온 손탁이 호텔을 건립, 내외국인의 사교장으로 쓰던 곳”이라는 내용이 씌어 있다. 이 손탁호텔은 개화기 조선의 역사적 사건들이 긴밀하게 얽혀있다.
손탁은 고종에게서 하사받은 한옥 저택의 실내 인테리어를 서양식으로 장식해 서양 외교사절들의 사교장으로 활용했다. ‘손탁호텔’이라는 명칭은 1909년에 정식으로 사용된 것으로 그 이전에는 ‘손탁양저(孃邸)’ 또는 ‘손탁빈관(賓館)’, ‘한성빈관(漢城賓館)’ 등으로 불렸다. 손탁호텔에는 주로 서울에 오는 국빈들이 머물렀다.
당시에는 아직 서울에 호텔이 없었기 때문에 조선을 방문한 서양인들은 손탁의 사저에 머무르는 것을 최고로 생각했다. 그러나 외국인들의 서울방문이 빈번해지자 방 5개로는 협소하게 됐고, 이에 고종은 왕실재정으로 이를 확장해 줬다. 1902년에 2층으로 된 서양식 벽돌건물이 준공됐다. 역시 사바친이 설계한 증축된 손탁호텔은 벽면 전체를 아케이드 처리한 전형적인 러시아풍의 아름다운 근대 건축물이다. 손탁은 이를 호텔식으로 개조했다. 2층은 귀빈실, 1층은 일반실과 커피숍이 있었다. 이 커피숍은 일반인들이 커피를 마실 수 있는 최초의 공간이었다.
손탁호텔에는 영국수상 처칠도 묶었고 미국 시오도어 루즈벨트 대통령의 딸 앨리스도 이용했다. 이토 히로부미도 이 호텔에 투숙하며 조선의 대신들을 초청해 회유하고 협박했다. 배일운동의 중심지가 을사늑약을 체결토록 하는 일제강점의 현장이 되고 말았다.
손탁은 한일합방 이전인 1909년 보에르에게 이 호텔을 매각했고, 보에르는 1917년에 이를 다시 이화학당에 매각했고, 이화학당은 이를 기숙사로 사용하다가 철거한 후 1923년에 이 자리에 ‘프라이 홀(Frey Hall)’을 신축했다. 그러나 ‘프라이 홀’마저 1975년의 화재로 소실돼 현재로서는 과거 손탁호텔의 흔적마저도 찾을 수 없게 됐다.

■여행정보
○주변 볼거리: 덕수궁에서 정동길을 따라 가면서 볼거리들이 산재해 있다. 정동극장, 정동제일교회, 이화여고 내의 심슨 기념관, 아젠펠러의 삶을 조명할 수 있는 배재학당역사박물관, 을사늑약이 이뤄졌던 중명전, 시립미술관, 구 러시아 공사관 등을 찾아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덕수궁: 중구 정동 5-1, 정관헌:중구 정동 1-23/문의:문화재청 덕수궁관리소:02-771-9952, deoksugung.go.kr, 관광정책팀:02-3396-4971, 관광사업팀:02-3396-4981
○이화여고 심슨기념관: 정동 32-1/문의:02-752-3345/운영:화~일요일 10:00~17:30
○중명전: 정동 1-11/문의 02-732-7524, deoksugung.go.kr/운영 화~일요일 10:00~17:00
○정동제일교회: 정동 34/문의 02-753-0001~3, chungdong. org
○배재학당역사박물관: 정동 34-5/문의 02-319-5578, appenzeller.pcu.ac.kr/운영 화~일요일 10:00~17:00
○경운궁 양이재: 정동 3/문의 02-738-6597, skhseoul.or.kr
○정동극장: 정동 8-11/문의 02-751-1500, miso.chongdong. com/운영 화~일요일 09:00~18:00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동 37/문의 02-2124-8800, sema. seoul.go.kr/운영 화~일요일 10:00~20:00
○별미집: 남도추어탕(02-773-7888, 정동 11-4),  부대찌개 잘하는 덕수정(02-755-0180, 정동 11-5), 유림면(서소문동 16, 02-755-0659)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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