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주환 (법무법인 JP 변호사)

얼마 전 동료 변호사들과 식사를 하면서 키코 사태가 화제에 올랐다. 한 변호사가 법원이 은행들의 손을 들어줬으니, 은행 쪽에서 각 피해기업들에게 수천만원에 이르는 소송비용을 청구할 차례라는 얘기를 꺼냈다. 키코(KIKO) 사태의 어두운 그림자는 너무 짙고, 너무 잔혹하다.
대법원은 지난해 9월 “키코통화옵션계약은 계약 체결 당시 불공정하지 않았고, 사후에 외부환경의 급격한 변화에 따라 계약당사자 일방에게 큰 손실이 발생하고 상대방에게 이익이 발생할 수 있는 구조라고 하여 당연히 불공정한 계약에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판시, 중요한 법리적 논쟁을 종결시켰다.
판결에서 대법원은 계약 체결 당시 시장 환율 추이와 대다수 국내외 연구소 및 금융기관 등의 환율 전망에 비춰 시장 환율이 상승할 확률이 높지 않으리라고 예상했던 점을 근거로, 당시의 키코 계약은 불공정하지 않았다는 논리를 펼쳤다. 과연 환율상승이 키코 계약 체결 당시에는 전혀 예상할 수 없는 일이었을까.
키코와 같은 파생금융상품을 설계하는 한 외국계 금융기관 관계자를 최근 만난 적이 있다. 키코에서 중소기업들이 손해를 보는 환율 구간대는 금융기관들이 그런 사건(event)이 발생하지 않을 것으로 전망한 구간대이기는 하지만, 금융기관들은 리스크를 줄이기 위해 환율이 급상승할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 투자 포지션을 취해 둔다고 한다. 시장의 현실이 이와 같다면, 중소기업들만 위험을 고스란히 떠안아야 하는 키코 계약이야말로 불공정한 거래의 전형이 아닐까.
키코 소송에서 또 다른 쟁점 중 하나는‘위험고지가 제대로 됐는지 여부’였다.  2008년 10월경 코스닥 상장기업 재무담당임원(CFO)들의 저녁식사 자리에 동석한 적이 있다. 여기서 은행들이 중소기업 관계자들을 초청해 해외에서 열었던 외환 관련 세미나가 실은 키코를 팔기 위한 마케팅이었다는 이야기, 키코 손실이 커졌으니 다른 상품으로 바꿔보라고 권유해 비슷한 파생금융상품에 가입했다가 피해가 갑절로 늘었다는 사연 등을 들으면서 귀를 의심하기도 했다. 은행에 책임이 없다는 취지의 몇몇 키코 관련 개별사건 판결들을 가슴으로 수용하기 어려운 까닭은 이런 경험 때문이다.
어쨌든 키코 상품이 판매 당시 불공정한 거래였는가 등을 법리적으로 다투는 것은 이제 어려워졌다. 2010년 10월 금융감독원 집계에 따르면 키코 피해기업은 738개사, 피해금액은 3조2247억원이다. 키코 피해기업 공동대책위원회에 가입한 242개 업체의 피해액만 2조2399억원에 이른다.
키코 사태를 처음 접하면서 가슴 답답하게 느껴졌던 부분은 금융감독당국이 왜 선제적 조처를 취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왜 중소기업들에게 상품의 위험성을 제대로 경고하는 전문가집단이 없었을까라는 점이었다. 이런 사정을 들여다보면 키코 피해를 개별 기업들만의 책임으로 돌리는 것은 부당한 일이라는 생각을 피할 수 없다.
금융감독원은 얼마전 국내 주요 금융회사 파생상품 담당자를 소집해서, 수출 중소기업에 고위험 환헤지 상품을 팔 때 해당 상품의 위험성을 충분히 알릴 것을 주문했다고 한다. 최근 원-달러 환율이 급락하면서 중소기업에게 큰 피해를 준 2008년의 키코 사태가 재연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라고 한다. 지금 보기엔 너무나 당연한 금융감독원의 이런 노력을 왜 7년 전에는 찾아볼 수 없었던 것일까.
최근 은행권은 이른바 사회적 책임경영을 내세우고 이런 저런 활동들을 홍보하느라 열심이다. 은행들이‘사회적 책임’차원에서, 키코 피해기업들을 상대로 한 소송비용 청구만이라도 포기하겠다고 선언할 수는 없을까. 은행들이 중소기업들의 고통에 대해 함께 아파하는 모습을 보일 때, 은행들의 사회적 책임경영이 국민들로부터 박수를 받게 되지 않을까.

임주환 (법무법인 JP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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