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인열전]이왕기 ㈜대성엔지니어링 대표

▲ 이왕기 대표

어릴 때부터 기계를 고치고 뜯어보는 일에 관심이 많았던 이왕기 ㈜대성엔지니어링 대표.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자신의 꿈을 찾아 전문계 의정부공고를 선택할 정도로 기술에 대한 열정이 남달랐다. 졸업 후 중소기업에서 근무하던 이 대표는 스물여덟의 나이에 창업을 결심한다. 농사짓던 아버지 소유의 농토를 담보로 대출받은 2000만원이 자본의 전부였다.

설계 위주의 회사를 차리는데 꼭 필요한 컴퓨터와 오토캐드와 같은 설계 프로그램을 장만하는데 종잣돈의 절반인 1000만원을 써버렸다. 남은 돈 1000만원은 사무실 보증금으로 냈다. 이 대표와 경리 직원, 그리고 설계 직원 둘. 자본금 2000만원에 유보자금 0원, 네명의 직원으로 차린 회사가 현재 62명의 직원이 연 매출 156억원(2014년 기준)을 올리는 ㈜대성엔지니어링의 시작이다.

이 대표는 반도체 제작 공정의 후(後)공정 설비 제작에 25년간 종사한 숙련기술인으로 대한민국이 세계 1위의 반도체 기술강국을 이끈 숨은 주역이다. 전량 수입에 의존하던 반도체 제작 공정에 필요한 제품인 체인지 키트와 UV조사기의 국산화에 성공해 반도체 산업의 생산성 향상에 크게 도움을 줬다.

“90년대까지만 해도 국산화된 장비가 거의 없었죠. 우리는 작은 부품 하나부터 시작해 설비 자체의 국산화에도 성공했습니다. 설비 국산화는 매우 중요합니다. ‘대응 속도’가 빨라지거든요. 수입 제품의 경우, 문제 발생 이후 엔지니어가 파견되기까지 길게는 한달이 소요되지만, 국내 제품의 경우 실시간 대처가 가능합니다.”

그뿐 아니다. 수입품 대비 20~30% 저렴한 가격에 공급되지만 성능은 수입품에 뒤처지지 않는다. 모 대기업 반도체 제조 공정에 사용되는 UV조사기의 경우 90% 이상이 대성의 제품일 만큼, 대성의 기술력은 현재 업계 1위라고 봐도 무방하다. 하지만 이 대표는 오늘의 성공에 크게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2004년 사내 부설기술연구소를 설립해 매년 매출액의 6% 이상을 연구개발에 투자하고 있습니다. 하루가 다르게 세상이 변하고 새로운 제품이 출시되는데, 오늘의 성과에 취해있을 새가 어디 있겠습니까.”

대성에 위기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1997년 한국 사회를 강타한 외환위기에 대기업도 하루가 다르게 주저앉았다. 모든 기업이 긴축재정으로 운영되자 수주량도 크게 줄었다. 하지만 창립 이래 꾸준히 흑자를 기록하고도 무리하게 사업을 확장하거나 성공에 취해 한 눈 팔지 않은 덕에 유보자금이 꽤 쌓여있었다. 직원들을 대량 해고하며 위기를 극복하던 여타 회사들과 달리 우리는 버틸 수 있다고 다독였다.

“세계적인 경기의 흐름이라는 게 있잖아요. 수주량이 줄어드니 작업시간도 줄었고 직원들도 시간이 많이 남았어요. 저는 그 시간을 직원 교육과 그간 세세히 챙기지 못했던 것들을 되돌아보는 시간으로 삼았어요.”

전직원이 참여하는 정기 세미나를 개최하고, 매일 아침 1시간 씩 영어·중국어·일본어 교육을 실시했다. 이 대표의 투자는 틀리지 않았는지 이듬해 1998년, 대성엔지니어링은 최고 수익을 달성했다.

지금도 이 대표는 배우고자 하는 직원이 있다면 아낌없이 후원한다. 학기당 200만원의 등록금 지원은 물론, 학업과 직장을 병행할 수 있게 근무시간 조정 등의 편의도 제공한다. 중소기업으로는 드물게 MBA 진학도 지원하고 있다. 현재까지 세 명의 직원이 회사의 지원으로 MBA 과정을 마쳤다.

이 대표의 도전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2010년부터 미래성장 동력으로 방송용 LED조명 사업에 신규 투자하고 있다. 기존에 사용되던 ‘수은램프’를 ‘LED램프’로 대체하는 기술을 개발해 특허도 취득했다. LED램프는 수은램프 대비 10분의 1의 전력만으로 사용이 가능하고 교체주기도 길어 효과적이다.

“회사의 발전은 혼자 이뤄지는 게 아닙니다. 직원 개개인의 발전이 하나하나 모여 나타나는 결과죠. 직원에 대한 투자는 결국 회사의 미래를 위한 투자나 마찬가지입니다. 앞으로도 직원과 함께 성장하는 회사가 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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