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한은 ‘밀당’은 그만…‘선제적 처방’내놔야 약발
오히려 늦었다. 지난 12일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회는 기준금리를 2.0%에서 1.75%로 0.25%포인트 인하했다.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는 “두달 간의 경제지표로 판단한 결과 성장과 물가의 흐름이 예상했던 바에 못 미치는 것으로 나타났다”며 “이런 상황에선 한달이라도 빨리 인하를 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고 밝혔다. 이주열 총재는 이번 기준 금리 인하는 ‘선제적 대응’이라고 밝혔다.

채권 시장 전문가 10명 가운데 9명은 이번달 금통위에선 금리가 인하될 걸로 봤다. 시장에선 4월 금통위에서 금리가 인하될거라고 보는 의견이 압도적이었다. 그런 면에선 이주열 총재의 말처럼 선제적 금리 인하라고도 볼 수도 있다.

관가의 분위기는 달랐다. 정부와 정치권은 한은에 직간접적으로 금리 인하를 주문했다. 급기야 최경환 경제부총리는 다시 한 번 디플레이션 논쟁을 일으켰다. 한국 경제의 디플레이션 위험이 커진 만큼 금리를 인하해서 시중에 유동성을 공급해줘야 한다는 논리였다. 특히 저물가 기조가 도드라진 게 컸다. 담뱃값 인상에도 불구하고 물가상승률은 실질적으론 마이너스였다. 한은도 더 이상 버틸 재간이 없었단 얘기다. 그렇다면 선제적이라기보단 추세적인 결정이었다.

분명 지금 한국경제는 일본식 디플레이션의 초기 국면과 유사한 상황이다. 일단 디플레이션에 빠져들면 탈출하기가 쉽지 않다. 일본 정부도 1990년대 내내 대규모 경기부양책을 썼지만 백약이 무효했다. 물론 디플레이션의 근본적 원인은 인구 구조의 변화다. 고령 인구가 증가하면서 소비가 줄고 공급과잉 현상이 일어나면서 벌어지는 경기 하강 국면이 디플레이션이다. 그렇다고 출산을 장려하고 이민을 확대하는 근본적이지만 장기적인 처방에만 의존할 수는 없다. 암환자에게 운동을 하라고 처방하는 격이다. 당장 병증을 치료할 필요가 있다.

일본 정부도 일단 병증을 치료하려고 나섰다. 물론 장기 처방을 등한시한 것도 사실이지만 백과사전식 경기부양책을 내놓으며 치료에 매진한 것도 사실이다. 모조리 실패했다. 일본은 버블이 붕괴된 1990년부터 2012년까지 경기부양에 무려 212조엔을 사용했다. 오히려 대규모 정부 부채란 후유증만 남았다. 1990년대 초만 해도 GDP 대비 60%에 머물렀던 일본의 국가 부채는 2010년대로 접어들면서 250%에 육박하게 됐다. 정부부채가 무려 1000조엔을 넘어섰다.

2013년 아베노믹스가 시작됐을 때 모두가 부정적이었던 이유다. ‘세개의 화살’ 같은 일본 우화로 그럴듯하게 포장하긴 했지만 본질적으론 과거의 케인즈적 경기 부양책들과 대동소이했기 때문이다. 결국 아베노믹스는 빚쟁이 주제에 또 빚을 내 사업을 벌이겠다는 얘기였다. 이번엔 꼭 성공하리란 보장도 없었다. 실패하면 경제대국 일본조차 모라토리엄을 걱정해야 할 판이었다. 그래서 아베노믹스는 도박노믹스라고 불렸다.

그런데 아베 정부는 과거 정부들의 온갖 노믹스들이 왜 실패했는지를 꿰뚫어보고 있었다. 정책 당국과 통화 당국의 공조가 이뤄지지 않았다. 바꿔 말하면 정부가 시장에 확신을 주지 못했단 얘기다. 경기를 부양시키겠다고 했다가, 국가 부채 관리를 하겠다고 했다가를 반복했다. 막대한 재정을 풀었지만 제대로 돈이 흐르지 않고 과잉 SOC투자로 이어지면서 일본의 전국토가 공사판으로 변해버렸다. 이런 정부를 시장 주체들은 전혀 믿지를 못했다.

바로 이 지점이 디플레이션이 확산된 심리적 요인이다. 디플레이션은 기업이 투자 기회가 있어도 투자를 하지 않고, 가계는 소비 욕구가 있어도 소비를 하지 않는 상황이다. 그나마 투자 여력이나 소비 여력이 있으면 굶어 죽지는 않는다. 새롭게 시장에 진입한 청년층은 시장이 기회를 창출해주지 않기 때문에 결국엔 내핍 상태에 빠지게 된다. 그게 요즘 유행하는 달관 세대니 득도 세대니 하는 존재들이다. 득도 같은 표현은 멋지지만 결국 경제학적으론 경제적 자살자들에 해당된다.

2012년 12월 재집권에 성공한 아베 총리가 맨 처음 한 일은 시라카와 마사아키 일본은행 총재를 경질시키고 구로다 하루히코로 교체한 일이었다. 아베 뒤엔 리플레이션파의 거두 하마다 고이치 예일대 교수가 있었다. 아베의 경제가정교사로 유명한 인물이다. 리플레이션이란 연 2% 안팎의 저강도 인플레이션을 유발해서 경제를 부양하는 정책을 말한다. 경제를 냄비에 끓여먹기보단 프라이팬에 달달달 볶아서 먹겠단 얘기다.

하마다 고이치 교수의 코치를 받은 아베 총리는 반리플레이션파인 시라카와 마사아키를 숙청했다. 2013년 3월 취임한 구로다 하루히코는 통화 마피아라는 별명답게 곧바로 대규모 양적완화를 단행했다. ‘세개의 화살’같은 우화로 포장했지만 사실 아베노믹스의 내용은 뻔하다. 오히려 이런 정책과 통화의 찰떡 공조가 아베노믹스의 근본적인 추진력이다.

선제적이라고 말했지만 추세적이었던 한은과 그런 한은한테 억지로 압력을 넣어야 하는 정책 당국의 밀당은, 초이노믹스의 치명적인 약점이다. 선제적이지 못한 정부의 모습은 시장 주체들한테 확신을 줄 수 없다. 어떤 기업인도 그런 정부를 믿고 리스크를 감수하지 않는다.

이제 한국경제는 가보지 않은 길로 들어섰다. 1%대 기준 금리는 사상 초유다. 가보지 않았기 때문에 정부의 역할이 더 없이 중요하다. 결국 정책과 통화 당국의 태도가 시장에 얼마나 확신을 주느냐가 1% 시대의 성패를 좌우한다.

금리 인하만 중요한 게 아니라 금리를 인하하면서 보여주는 당국의 시그널이 진짜 중요하단 말이다. 결국 시장 주체들이 정부도 서로도 믿지 못하게 되면, 소비도 투자도 하지 않는 진짜 디플레이션이 시작된다. 지난 20년 동안 일본이 지긋지긋하게 겪었던 일이다. 

- 글 : 신기주(에스콰이어 피처 에디터 「사라진 실패」 의 저자)
- 일러스트레이션 서용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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