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기주의 기업 인사이트] 박삼구의 금호家 어디로…

박성용 명예회장의 빈자리가 컸다. 지난달 21일이었다. 박성용 금호아시아나그룹 명예회장의 10주기 추모 음악회가 열렸다. 박성용 회장은 2005년 5월23일 별세했다. 고 박성용 회장은 한국 클래식 음악의 든든한 후원자였다. 정트리오와 장한나와 장영주와 백건우 등 기라성 같은 클래식 음악가들이 음양으로 박성용 회장의 지원을 받았다. 10주기 추모식이 클래식 음악회 형식으로 마련된 이유다.

박성용 회장은 금호아시아나그룹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금호는 광주를 기반으로한 지역 운송업체로 출발했다. 박인천 창업주는 1948년 광주여객자동차를 설립했다. 지금의 금호고속이다. 1960년 금호타이어를 설립하면서 운송업체에서 제조업체로 진화했다. 1970년대 금호는 사업영역을 석유화학과 건설 분야까지 확대한다.

박인천 창업주 시절의 금호는 아직은 호남 토착 기업이었다. 금호를 전국구 기업으로 발돋움시킨건 박인천 창업주의 장남인 박성용 2대 회장이었다. 박성용 회장은 예일대 경제학과를 졸업했다. 1968년부터 1970년까지 청와대에서 경제담당 보좌관으로 일했다. 본격적으로 금호 경영에 몸담기 전까진 서강대학교에서 경제학을 가르쳤다. 금호는 1988년 정부의 제2 민항사업자로 선정된다. 덕분에 금호는 단숨에 재계의 중심으로 진입할 수 있었다. 박성용 회장이 구축해놓은 두터운 정·관·재계의 인맥에 호남에 대한 정치적 배려가 더해진 결과였다.

박성용 회장은 금호를 알짜 기업으로 성장시켰다. 아시아나 항공과 금호고속을 중심으로한 운송업과 금호석유화학과 금호타이어를 중심으로한 제조업과 금호건설과 금호터미널을 중심으로한 건설부동산업이 금호의 삼각축이었다. 1990년대 금호는 3붐으로 성장했다. 해외 여행 자유화로 해외여행 붐이 일어나자 항공 수요가 폭발했다. 마이카 붐으로 자동차 타이어 수요가 폭발하자 금호타이어와 석유화학이 동반 성장했다. 아파트 붐이 일어나면서 건설 수요가 폭증하고 부동산 가치가 상승했다. 박성용 회장은 3붐을 타고 금호를 황금기로 이끌었다.

무엇보다 박성용 회장은 금호가를 재계의 대표적 명문가로 격상시켰다. 박성용 회장은 평소에도 입버릇처럼 “65세 정년이 되면 회장직을 동생한테 물려주겠다”고 말했다. 실행했다. 65세가 되던 1996년 회장직을 손아랫 동생인 박정구 회장한테 물려줬다. 형제의 난은 늘 재벌가 모두의 우환거리였다. 박성용 회장은 형제 경영의 모범 사례를 보여줬다. 재계가 금호가를 바라보는 눈이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회장직에서 물러난 뒤부턴 금호아시아나문화재단 이사장 업무에 집중했다. 박성용 회장은 한국 기업 문화후원 활동의 초석을 놓은 인물이다. 한국 클래식 음악계는 박성용 회장한테 적잖은 빚을 졌다. 덕분에 금호가의 위상도 높아졌다. 재력과 교양을 겸비한 당대의 명문재벌가로 손꼽히게 됐다. 영남에 삼성가가 있다면 호남엔 금호가가 있었다.

이것이야말로, 금호의 전성기 시절 위상이다. 격세지감이다. 지금의 금호는 만신창이 신세이기 때문이다. 한때 내실 경영과 형제 경영의 표본으로 불렸던 금호는 이제 승자의 저주와 형제의 난의 대표적인 반면교사로 거론된다.

금호의 비극은 2005년 박성용 회장이 세상을 뜨면서 시작됐다. 금호아시아나그룹은 이듬해인 2006년부터 갑자기 과속을 하기 시작한다. 2006년은 금호아시아나그룹 창립 60주년이었다. 금호아시아나그룹은 2006년 대우건설 인수전과 2008년 대한통운 인수전에 잇따라 뛰어든다.

모두 박삼구 금호아시아나그룹 회장 체제에서 돌출된 일들이다. 박삼구 회장은 2002년 손윗형 박정구 회장에 이어 금호의 최고경영자가 됐다. 당시 박정구 회장은 65세였다. 박정구 회장의 숙환 탓도 있었지만 어쨌든 박성용 회장이 기틀을 닦은 형제 경영의 전통이 지켜진 셈이었다.

박삼구 회장은 취임 당시부터 대한통운과 대우건설에 눈독을 들였던 걸로 알려졌다. 금호산업의 건설 부문에 당시 시공능력 2위였던 대우건설을 더해서 단숨에 건설업계 1위로 올라선다는 청사진이었다. 여기에 아시아나와 금호고속의 운송망에 대한통운의 물류망을 더해서 운송물류 부문도 도약시킨다는 계획이었다. 화학과 건설과 운송이라는 그룹의 삼각축 가운데 두개를 과감한 인수합병으로 퀀텀점프시키겠다는 그림이었다.

그림은 나쁘지 않았다. 실력이 문제였다. 금호가 지불한 대우건설 인수금은 6조원대에 달했다. 대한통운 인수금은 4조원대였다. 모두가 시장이 평가한 적정가보다 두배 가량 높았다. 사실상 닥치고 인수한 것에 가까웠다. 그나마도 인수자금 대부분을 은행권에서 차입했다. 모자라는 돈은 위험천만한 풋백옵션까지 걸어서 조달했다. 이 풋백옵션은 나중에 금호를 침몰시키는 치명타가 됐다.

지금 금호아시아나그룹은 외형적으론 박삼구 회장으로 대표되고 있지만 실질적으론 산산조각나 있다. 아시아나항공을 거느린 지주회사 금호산업의 지분 57.5%는 채권단 소유다. 현금창출능력이 출중한 알짜 회사 금호타이어도 역시 채권단의 수중에 있다. 2009년 대우건설을 토해내면서 그룹의 삼각축 가운데 하나였던 건설부문은 사실상 잘려나갔다.

명문재벌가의 위상도 흔들렸다. 그룹의 다른 축이었던 화학부문의 주력 계열사 금호석유화학은 박삼구 회장의 손아랫 동생 박찬구 회장이 차지한지 오래다. 박삼구 회장과 박찬구 회장은 형제 경영의 전통을 스스로 박살내버렸다. 상호 소송전과 비방전이 점입가경인 상황이다. 박성용 회장의 10주기 추모식도 형제가 따로 열었다. 박성용 회장 시절 금호의 전성기를 견인했던 삼각축은 완전히 와해됐다. 동시에 명문 금호가의 명성도 추락해버렸다.

그래서, 2015년은 금호한텐 중대한 한해일 수밖에 없었다. 채권단이 금호산업과 금호타이어와 금호고속의 지분 매각 작업을 본격화하기로 돼 있었다. 2015년 상황은 결코 녹록지 않았다. 산업은행과 미래에셋 같은 채권단이 금호에 물려있는 돈만 3조원에 달한다. 상당액은 국민 세금인 공적 자금이다. 채권단도 국민 여론도 실패한 경영자인 박삼구 회장한테 결코 유리할 리가 없었다.

지금까지는 금호 관련 매각 작업이 박삼구 회장한테 유리하게 돌아가는 형국이다. 지난달 26일 금호아시아나그룹은 금호고속의 지분 100%를 IBK투자증권-케이스톤 사모펀드로부터 4150억원에 인수하는 주식매매계약을 체결했다. 금호고속은 박인천 창업주의 손때가 묻은 그룹의 모태다. 금호고속 환수는 분명 금호 재건 작업의 상징적 신호탄이다.

게다가 금호 재건의 핵심인 금호산업 인수전도 박삼구 회장한테 유리하게 전개되는 양상이다. 지난 4월 말 유력한 인수후보였던 호반건설이 6007억원을 써내면서 유찰됐기 때문이다. 금호산업이 거느린 아시아나 항공의 지분 가치만으로도 5000억원이 넘는다. 6007억원은 인수 의지 자체를 의심하게 만드는 터무니없는 액수였다. 이제 채권단한테도 박삼구 회장 말고는 별 대안이 없어진 상황이다. 6월 실사가 끝나면 7월부턴 치열한 가격 줄다리기가 예상된다. 일단은 박삼구 회장이 칼자루를 쥐었
다.
뜻밖의 상황이 연출된 진짜 이유는 따로 있다. 결국 박성용 회장 덕분이다. 박성용 체제 시절의 전성기 덕분에 금호가는 단순한 재력을 넘어 정·관·재계를 아우르는 사회적 영향력을 갖게 됐다. 금호가뿐만 아니라 삼성가나 현대가처럼 적잖은 한국의 재벌들이 이제 이런 힘을 가졌다. 그룹을 누란의 위기에 몰아넣은 박삼구 회장이 별다른 명분 없이 2010년 11월 경영 일선에 복귀할 수 있었던 것도 기업과 사회에 미치는 재벌가의 위상 덕분이었다.

금호는 금호가의 소유라는 뿌리 깊은 인식이 지분 관계보다 우선한다. 한국의 특수한 기업 환경이다. 박삼구 회장은 개인적으로도 정·재계의 마당발로 통한다. 금호가와 박삼구 회장의 영향력이 인수전을 예상치 못한 양상으로 전개시키고 있다. 박삼구 회장은 직원들 앞에서 입버릇처럼 “도와주시겠다는 분들이 많다”고 말한다. 의미심장한 말이다.

실제로 호남고속철도 개통으로 영업이익은 좀 줄었다지만 여전한 캐시카우인 금호고속 인수전엔 별다른 경쟁자조차 없었다. 금호산업 인수전에는 애초에 참가하려고 했던 사모펀드도, 신세계 같은 재벌도, 호반건설 같은 동일 지역 기반 경쟁자도, 모두 중도 포기하거나 사실상 들러리에 가까운 역할을 했다. 재계에선 이걸 재벌의 상도의라고 부른다. 시장 논리를 넘어서는 재벌 논리가 작동하고 있단 뜻이다.

여기에 호남 기업에 대한 배려라는 정치적 역학까지 작동하고 있다. 박삼구 회장 이외에는 대안이 없는 게 아니라 시장이 스스로 대안을 찾지 않게 만드는 분위기가 있단 말이다. 이건 일종의 권능이다. 박성용 회장 체제 때부터 재벌의 위상을 쌓아온 공덕이다.

지난달 21일 박성용 회장의 추모 음악회 무대엔 피아니스트 손열음과 첼리스트 고봉인과 바이올리니스트 권혁주가 올랐다. 이른바 금호 음악 영재들이다. 추모 음악회에서 금호는 워크아웃을 넘나드는 기업을 넘어 명문 재벌가 그 자체였다. 추모 음악회에선 차이코프스키의 피아노삼중주 <위대한 예술가를 위하여>가 연주됐다. 금호의 수호신 박성용 회장을 기리는 곡이었다. 한국에서 재벌은 어쩌면 시장보다 강하다.

-글 : 신기주(에스콰이어 피처 에디터 「사라진 실패」 의 저자)
- 일러스트레이션 서용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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