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경기가 좋아지면 물가가 오를 가능성이 크고 경기가 나빠지면 물가 하락의 압력이 커진다는 게 상식으로 통해왔다. 그러나 경기 변동과 물가의 상관관계가 점차 약해지고 있다는 분석이 나왔다.

한국은행 물가동향팀의 박성하·최강욱 과장과 부유신 조사역은 지난 20일 ‘물가지수 구성항목별 경기 민감도 분석’이라는 보고서를 통해 “우리나라에서 금융위기 이후 인플레이션에 대한 경기의 영향력이 축소됐다”고 밝혔다. 특히 “수요 측면의 물가상승 압력을 잘 반영하는 것으로 알려진 근원인플레이션의 경우 2012년 이후 경기 흐름과 상반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고 설명했다.
근원인플레이션은 농산물과 석유류를 제외한 소비자물가의 상승률을 말한다.

제도적 요인으로 기존 공식 붕괴
농산물과 석유류 가격은 국내의 경제 상황보다 해외 요인이나 기상여건 등에 영향을 많이 받는다. 연구팀이 우리나라 근원물가지수를 구성하는 429개 품목을 경기 변동에 통계적으로 의미 있는 영향을 받는 ‘경기민감품목’과 그렇지 않은 ‘경기비민감품목’으로 분류했다.

개별 필립스곡선 모형을 추정한 결과, 경기민감품목은 229개(53.4%)이고 이들 품목의 가중치 비중은 56.1%로 나타났다.

경기민감품목에서 개인서비스가 44.6%로 절반가량 차지했고 공업제품(23.8%), 집세(18.6%)도 비중이 컸다. 예컨대 전·월세, 짜장면, 소파, 수입 쇠고기, 학원비 등이 경기민감품목에 해당한다.

반면 경기비민감품목 200개의 경우 공업제품(38.9%)과 공공서비스(25.1%), 곡물·축수산물(6.4%) 등의 비중이 컸다. 국산 쇠고기, 스마트폰, TV, 담배, 전기료, 설탕, 전기료, 학교급식비, 주차료 등이 경기비민감품목에 해당한다.

연구팀은 “최근 경기와 물가 간 괴리 현상은 경기비민감품목의 영향력이 확대된데 주로 기인했다”고 진단했다.

비민감품목의 약 40%를 차지하는 공업제품의 경우 기술혁신과 글로벌 경쟁 심화 등이 주된 원인으로 꼽혔다. 경기는 좋아지는데 신기술 개발이나 가격 경쟁이 심해지면서 오히려 물가를 떨어뜨리는 경우가 많다는 얘기다.

나머지 40%를 차지하는 공공요금 관련 품목과 약 20%를 차지하는 축산물·개인서비스 품목의 경우 제도적 영향이 컸다. 무상급식이나 무상보육, 한우 수급조절, 담뱃값 인상 등 정부의 정책 대응으로 경기와는 무관하게 움직이고 있다는 설명이다.

공업품 가격 하락 지속될 것
한국은행은 앞으로도 경기 비민감품목의 물가 영향력이 계속 확대될 수 있는 만큼 정확한 물가 압력을 판단하기 위해선 이런 요소를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글로벌화가 진전되면서 공업제품의 가격 하락 추세가 계속 이어질 수 있고, 공공요금을 비롯한 여타 경기 비민감품목 역시 제도적인 요인 등으로 경제 기초여건과 괴리되는 요인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그만큼 크다는 지적이다.

소비자물가가 체감물가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는 목소리도 여전하다. 버스비와 난방비, 월세, 사교육비 등 체감도가 높은 항목의 비중이 그만큼 크지 않다는 얘기다. 통계청은 전·월세나 담배값 등 최근 가격이 많이 오른 구성 항목들의 가중치를 변경해 내년부터 새롭게 적용할 예정이다.

박성하 과장은 “글로벌화 진전 등으로 경기비민감품목의 비중이 중장기적으로 높이지면서 물가에서 해외요인의 영향력이 확대될 수 있다”고 내다봤다. 이어 “한국은행이 앞으로 물가 압력을 판단할 때 이 같은 괴리현상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는 뜻”이라면서 “통계청이 소비자물가와 근원물가를 조사하는 목적이 다른 만큼 당장 구성품목의 변화가 필요하다는 의미는 아니다”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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