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라운지] 美 IT업계 큰별 앤디 그로브 타계

지난 21일 미국 IT업계의 거성인 앤디 그로브(Andy Grove)가 79세의 나이로 타계했다. 그는 30년간 인텔의 사장, 최고경영자(CEO), 회장을 연달아 맡으면서 인텔의 최고 전성기를 이끌었다. 1987년 인텔 CEO에 올라 2005년 이사회 의장을 지낸 후 은퇴하기까지 미국 실리콘밸리에 끼친 그의 영향력은 실로 엄청났다.

그로브는 지금도 손에 꼽히는 몇 안 되는 스타 CEO 중에 한 명이다. 스티브 잡스의 멘토 역할을 한 만큼 IT산업에 있어 입지적인 인물이다. 하지만 그의 출신환경은 녹록지 못했다. 헝가리 유대인 출신인 그로브는 나치와 소련의 박해를 피해 스무 살의 나이에 미국으로 건너왔다. 1956년 미국에 망명할 당시 그의 수중엔 20달러가 전부였다. 영어도 전혀 못했다. 그런 그가 20년 뒤 세계 최대 반도체 기업인 인텔의 CEO가 될 것이라곤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을 것이다. 

‘인텔 인사이드’를 창조한 CEO
미국에 있는 친척의 도움으로 난민 수용소를 벗어난 그로브는 뉴욕시립대학교를 다니며 화학공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학비가 전액 무료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후에 UC버클리에서 화학공학으로 박사 학위를 딴 그로브는 1963년 반도체 기업 페어차일드(Ffairchildsemi)의 반도체 연구원으로 입사한다. 그의 능력은 입사 초기부터 발휘됐다.

반도체 개발을 위한 수식 계산에 어려움을 겪고 있던 페어차일드는 그로브가 만든 프로그래밍 언어 ‘포트란(Potran)’을 통해 해결하기에 이른다. 그로브가 경영자로 화려하게 변신하게 된 발판은 인텔의 러브콜 덕분이었다. 인텔의 창업자인 고든 무어와 로버트 노이스는 1968년 인텔을 창업하면서 그로브에게 합류를 요청한다. 인텔의 세번째 핵심 멤버가 된 그로브는 1979년 인텔 사장으로 승진했고, 1987년에는 인텔의 대표이사로, 1997년에는 인텔의 회장 직책까지 올라선다.

이 기간에 그로브의 주된 업적은 바로 주력 사업을 메모리칩에서 컴퓨터용 마이크로프로세서로 변경한 것이다. 1980년대 중반 메모리 산업은 일본기업들의 발 빠른 추격으로 사실상 제로섬 게임에 빠졌다. 인텔에겐 새로운 길이 필요했던 시기다. 이렇듯 중차대한 때에 그로브는 무어와 노이스 등과 손잡고 인텔을 메모리에서 비메모리 반도체로 사업 방향을 과감하게 튼 것이다.

인텔의 무서움은 이 때부터 시작됐다. 인텔은 경쟁사를 압도하는 첨단 기술과 독특한 마케팅으로 세계 마이크로프로세서 시장을 좌지우지하게 된다.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386’ ‘펜티엄’ 등의 CPU 브랜드나 인텔 CPU를 사용한 PC에 붙는 ‘인텔 인사이드(Intel Inside)’ 등도 모두 그로브가 추진한 값진 결실들이었다.

그로브에겐 유명한 어록이 많다. “성공은 자만을 낳고, 자만은 실패를 낳는다. 오직 편집광만이 살아남는다(Only the paranoid survive)” “삼류 기업은 위기에 의해 파괴되고, 이류 기업은 위기를 이겨내며, 일류 기업은 위기로 인해 발전한다” 등 IT업계는 물론 경영자라면 한번쯤 곱씹을 만한 금언을 남겼다.

IT 경영의 방향성을 제시한 멘토
사실상 인텔은 성공의 아이콘이었다. 실리콘밸리에 있는 대다수의 IT기업들이 인텔처럼 되기 위해 그로브의 이론과 경영전략을 표본으로 삼을 정도였다. 지금은 혁신의 상징이 된 애플의 창업자 스티브 잡스도 살아생전에 그로브를 자주 찾으며 사업방향을 함께 고민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국에서도 그로브의 영향을 받은 대표적인 인물이 있다. 황창규 KT 회장이다.

삼성전자 반도체 사업을 이끌었던 그는 대학시절 그로브가 쓴 책을 읽다가 반도체 연구를 위해 유학을 결심했다고 전한다. 하지만 IT업계 거성인 그로브도 노년기에는 어쩔 수 없이 병마에 시달려야 했다. 일찍이 1995년 전립선암 판정을 받은 그는 2000년 무렵 파킨슨병 진단을 받고 투병했다. 그로브는 파킨슨병 치료 연구를 위해 한 기관에 3000만달러를 기부하기도 했다.

인텔의 전성기를 지휘하던 그는 세상을 떠났지만 그로브가 남긴 유산은 인텔 곳곳에 여전히 남아 있으며, 계승 발전 중이다. 인텔이 그로브의 유산을 뛰어넘는 획기적인 혁신을 하려면, 새로운 재질과 생산 방식으로 만든 반도체가 탄생해야 한다. 그것은 아직 묘연해 보인다. 어떻게 보면, 우리는 그로브가 만든 인텔 인사이드를 더 오래 즐겨야 할 것이다.

- 글 : 하제헌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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