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대담] 정 운 찬 동반성장연구소 이사장

정운찬 동반성장연구소 이사장은 한국을 대표하는 경제학자 중 한명이다. 경제학을 전공한 사람이라면 정 이사장이 집필한 ‘거시경제론’을 한번쯤은 접해봤을 것이다. 이 책은 1982년 처음 출판된 이래 개정을 거듭하면서 아직까지도 강의 교재로 사용되고 있다. 동시에 정 이사장은 대표적인 ‘동반성장 전도사’이기도 하다.
이명박 정부 시절 국무총리를 역임하면서 우리 사회에 동반성장 화두를 지속적으로 던졌고,총리 퇴임 후에는 초대 동반성장위원장으로 일하면서 중소기업적합업종제도 도입 등 굵직굵직한 성과도 냈다. 위원장에서 물러난 정 이사장은 동반성장연구소를 설립하는 등 동반성장 문제에 올인하고 있다. 한국경제가 저성장으로 시름시름 앓고 있는 이때, “왜 지금 동반성장이어야 하는가?”를 묻기 위해 관악구 봉천동에 소재한 연구소를 찾아 정운찬의 ‘동반성장론’을 들어봤다.
<대담 : 권기만 편집국장 / 정리 : 김도희 기자/ 사진 : 오명주 기자>

-지난 2012년부터 동반성장연구소 이사장을 맡고 있다. 설립 계기와 연구소의 역할은 무엇인가
어린 시절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중학교 입학금을 마련하지 못해 학업을 포기하려던 때 도움의 손길을 내민 분이 계셨다. 바로 3·1독립운동 민족대표 34인으로도 잘 알려진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 박사다.
중·고교 등록금과 생활비를 지원하는데 그치지 않고 정신적 지주로서 가치관 형성에 커다란 영향을 줬다. 특히 대학 진학을 앞두고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으로 성장은 되는데 한국사회의 빈부격차가 심각하다. 여기에 대해 고민할 수 있는 학과로 진학하라”는 조언을 해주시기도 했다.
초대 동반성장위원장을 지내면서 ‘중소기업적합업종 선정’‘중소기업 위주의 정부 구매 확대’‘초과이익공유제 논의’등 나름의 성과도 있었지만, 정부의 동반성장 의지 부족, 재계의 비협조 등의 문제로 한계를 느끼고 물러났다.
이후 위원장 시절 미진했던 일들이 마음에 걸려 순수 민간단체인 동반성장연구소를 설립하게 됐다.
‘동반성장 문화의 확산’이라는 목적은 위원회와 같지만, 대·중소기업 간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루던 위원회와 달리 연구소에서는 빈부간, 도농간, 국가간 격차 등 동반성장 문제에 폭넓게 접근하는 한편, 정기적인 포럼 개최를 통해 동반성장 이슈를 발굴하고 있다.

-지속되는 저성장 기조와 더불어 최근의 산업 구조조정, 브렉시트 등 대내외 변수에 우리 경제가 갈피를 못잡고 있는 모습이다. 한국경제의 현 상황을 진단한다면
현재 한국경제는 ‘저성장과 양극화’로 정리할 수 있다. 1980년대 8.6%, 1990년대 6.7%이던 경제성장률이 2000년대 들어서는 4.4%로 하락하더니 2010년대에는 2%대로 굳어지는 모습이다.
소득 불평등에 따른 경제력 집중 문제도 심각하다. 개인으로 보면 상위 1%가 전체 소득의 15% 정도를 차지하고 있다. 기업으로 눈을 돌려봐도 현대·삼성·LG·SK 등 4대 그룹의 연간 매출액이 우리나라 GDP의 60%에 달하는 실정이다. 30년 전에는 이 수치가 20% 정도에 불과했다는 점을 놓고 보면 그만큼 재벌 의존도가 커졌다고 볼 수 있다.
특히 1997년의 외환위기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거치면서 가계와 기업의 양극화가 가속화되면서 가계부채와 중소기업 부실이 한국경제의 발목을 잡는 문제로 자리잡았다. 우리 사회에서 ‘분배의 공정성’을 개선하지 않고는 더 이상 성장을 기대하기 어렵게 된 핵심배경이 바로 여기에 있다.

-평소 위기에 빠진 한국경제의 해법은 동반성장이라고 강조해 왔다. 구체적인 견해와 방안을 알려달라
성장이 어려운 이유야 많겠지만 직접적인 원인으로는 기업의 투자부진을 꼽을 수 있다. 특히 대기업의 경우 투자할 자금은 충분하지만, 투자대상을 찾지 못하고 있다. 이렇게 투자처를 찾지 못해 쌓아둔 현금이 상위 10대 그룹 기준으로 450조원에 달한다.
대기업의 투자 대상은 결국 첨단핵심기술일 것이고, 첨단핵심기술은 연구개발(R&D)을 통해 창출된다. 한국의 R&D는 지출규모만 놓고 보면 세계 5위로 최상위권에 해당한다. 그런데도 이렇다할 차세대 첨단핵심기술이 나오지 않고 있다. 이는 한국의 R&D에는 ‘D(Development·상품개발)’만 있고 ‘R(Research·기초연구)’은 없기 때문이다. 장기적으로 한국경제가 재도약 하기 위해서는 D→R로 방향전환이 필요한 시점이다.
단기적으로는 중소기업이 대안이 될 수 있다. 대기업과 달리 중소기업은 투자할 곳은 많은데 자금부족으로 투자여력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1960~70년대였으면 정부가 유망 중소기업을 선정해 직접 지원하는 방식이 유용할 수도 있겠으나, 경제구조가 복잡해짐에 따라 이제와서는 이 같은 방식을 적용하는 것은 무리라고 본다. 오히려 대기업으로 흘러갈 자금을 법·제도를 통해 중소기업으로 자연스레 흘러가도록 유도하는 방식이 바람직하다.

-이같은 동반성장 정책이 기업에 새로운 규제로 작용해 투자확대와 경제회복에 오히려 부담이 된다는 지적도 있다
동반성장의 개념을 오해해서 나온 말이다. 동반성장은 더불어 성장하고 함께 나눠서 다같이 살기 좋은 사회를 만들자는 취지에서 나왔다. 있는 사람 것을 빼앗아서 없는 사람을 주자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경제 전체의 파이를 크게 하되 분배의 룰만 조금 바꾸자는 것이다.
예를 들어 국가의 부를 100으로 놓고 부자와 빈자에게 각각 50대 50으로 분배되고 있다고 생각해 보자. 동반성장이 추구하는 것은 국가의 부를 100에서 110으로 키우되 분배는 55대55가  아닌 54대56 또는 53대57 정도로 나누자는 것이다.
다시 말해 부자와 빈자 모두 성장의 과실을 얻게 하되, 빈자의 증분이 부자의 증분보다 크게 하자는 게 동반성장이다.
‘초과이익 공유제’ ‘중소기업 적합업종’ ‘중소기업 위주의 정부구매’ 등도 마찬가지다. 이 같은 제도들을 통해 대기업으로 집중되던 자금 일부가 중소기업으로 유입되고, 중소기업은 이 자금을 바탕으로 투자를 늘린다면 ‘투자→생산→고용→소득→소비’로 이어지는 선순환 구조가 만들어 질 수 있다. 대기업은 중소기업을 같은 배를 탄 협력자로 인식해야 한다.

-초과이익공유제는 동반위원장 재임 시절 최초로 제안한 후 5년여가 지난 현재까지도 아직 논의 단계에 머물러 있다. 제도가 자리잡으려면 노력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초과이익공유제를 제안한 뒤 자본주의·시장경쟁 체제와 맞지 않는다며 반발이 많았다. 그러나 사실 초과이익공유는 자본주의의 산실인 할리우드에서 시작된 개념이다.
영화 제작 시 배급처가 배우나 감독과 계약을 맺으면서 영화의 흥행여부에 따라 수익 중 일부를 더 주겠다고 약속한 것으로 일종의 ‘러닝 개런티’(running guarantee)였다.
초과이익공유제를 대기업의 이익을 중소기업에 베푼다는 ‘시혜’ 개념으로 보는 것도 곤란하다. 오히려 대기업의 초과이익 상당부분은 납품단가 후려치기 등 중소기업의 희생으로 발생한다는 점으로 볼 때 초과이익공유는 ‘보상적 차원’의 개념이다.
일부에서는 “대기업이 애초에 목표이익을 높게 잡아버리면 그만”이라는 지적도 한다. 그러나 예를 하나 들어보자. 70점대 점수를 받던 아이에게 부모가 “80점을 넘으면 원하는 것을 사줄게”하면 아이는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공부를 열심히 할 것이다. 그러나 90점, 100점을 받으라고 하면 아이는 공부를 포기해버릴 가능성이 높다. 마찬가지로 대기업이 목표이익을 비현실적으로 정할 것이라고는 보지 않는다.

-최근 “야권에서 주장하는 경제민주화와 공정성장 정책의 지속가능성은 회의적”이라고 비판한 바 있다. 경제민주화, 공정성장과 동반성장은 어떻게 다른가
앞서 경제민주화나 공정성장을 비판했던 것은 이들 정책이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작동시키는 본질의 변화는 동반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핵심은 결국 이익을 무한히 추구할 자유를 바탕으로 한 승자 독식의 경쟁이다.
아담 스미스가 갈파한 ‘공정한 관찰자’(impartial spectator·도덕적 한계를 인식하게 하는 내면의 존재)는 사라지고 자유경쟁만 남은 신자유주의 시장경제는 개인의 이익추구만을 목표로 하면서 경제 불평등을 심화시켰다.
결국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앞으로도 지속 발전하기 위해서는 제도와 법도 중요하지만 경제활동의 주체인 ‘인간의 의식’이 핵심 역할을 맡아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경제민주화와 공정성장은 한계를 갖고 있다고 본거다. 경제민주화가 재벌독점을 해소하고 중소기업과 근로자에게 자유로운 경쟁기회를 부여하고, 공정성장으로 공정한 제도와 법을 만들어 공정경쟁을 유도하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또 다시 ‘경제 불평등’ 문제가 반복될 가능성이 높다.
동반성장은 경제민주화나 공정성장에서 한발 더 나아간 개념으로 공정한 법·제도에 더해 협력하는 문화를 넓고 깊게 구축하자는 것이다. 21세기형 ‘공정한 관찰자’는 함께 협력해 성장하는 ‘동반자 의식’이다.

-중소기업적합업종제도를 놓고 지금까지도 여러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중소기업계에서는 적합업종의 법제화를 주장하는 반면, 대기업에서는 세계무역기구(WTO) 등 통상규범 위반 등을 근거로 제도의 폐지를 지속 주장하고 있다
초대 동반성장위원장을 맡아달라는 부탁을 받고 이명박 대통령에게 위원회를 대통령 직속으로 설치할 것을 건의했었다. 논의 끝에 결국 ‘반민반관’ 형태로 출범하게 됐다.
최근 몇년간 지속적인 대기업의 반발로 몇몇 업종이 중소기업 적합업종에서 제외되는 상황을 보면 중소기업적합업종 만큼은 법제화를 통해 강제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예전에 한번은 기차를 탔는데 발광다이오드(LED) 조명등을 생산하는 중소기업의 대표께서 “대기업들이 시장에 자금력을 앞세워 들어오면 어쩌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는데 적합업종제도 덕에 안정적으로 매출을 늘릴 수 있었다”며 고마워하던 기억이 난다. 지금은 LED 조명등이 중소기업적합업종에서 제외된 것으로 알고 있다.
WTO 규범 위배로 통상마찰이 우려된다는 지적도 적합업종 제도를 통해 영향을 받는 외국기업의 규모가 크지 않을뿐더러 국익과 규범을 놓고 저울질한다는 것 자체가 적절치 않다고 본다.

-정 이사장에게 ‘러브콜’을 보내는 정당이 많은 것으로 알고 있다. 향후 행보가 궁금하다
어떤 일을 하는지가 중요한 거지 어느 자리에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동반성장 문화의 확산을 위해서라면 어떤 일이든 할 용의가 있지만, 지금 현재로서는 정계 진출 계획은 없다.
“일생을 빈부격차 완화를 위해 일하면서 살라”던 스코필드 박사님의 유지에 따라 앞으로도 지금까지 해왔던 것처럼 동반사회 건설을 앞당기는데 노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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