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을 꿈꾸는 사람들] (주)한진화학

▲ 안성철 회장

한국의 제조업이 아직 걸음마 수준이던 1963년, 부산 동래구에 ㈜한진화학의 전신인 광명페인트 공업사가 문을 열었다. 부산은 신발과 타이어, 섬유 등 2차 산업이 기틀을 마련한 지역으로 당시 우리나라 산업의 중심으로 통했다.

창업주인 안도현 회장은 이곳에서 안료제조와 유통을 전문으로 하는 작은 사업체를 시작했다. 그리고 안정적으로 사업을 확장해 가던 중 주력 제품이었던 건축용 도료만으로 지속가능한 성장을 담보할 수 없다는 판단을 했다. 도약을 위해서는 도료산업이 단순한 노동집약적 산업이 아니라 고도의 기술집약적 산업이라는 새로운 지표를 만들어야 했다.

2대 안성철(사진) 회장은 부친의 경영 방침에 따라 회사의 전 부서를 3~6개월씩 돌아보고 모든 부서의 업무를 익혔다. 이후 상무로 승진하고 회사의 구조적 문제를 혁신하는 역할을 도맡았다.

안 회장이 한진화학 상무로 발령받고 난 이후 회사의 체질이 급속하게 바뀌기 시작했다. 그가 제시한 화두는 ‘신뢰경영’이었다. 그는 선친의 ‘신뢰를 잃지 말라’는 경영철학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재해석했다. 은행 이자가 연 7~8%를 넘나들던 당시, 유사규모 업체 최초로 물품대 정기 지급제도를 도입했다. 물품대 정기 지급제도는 매달 물품을 구입한 대금의 지급 날짜를 정하는 것으로 한진화학은 당시 불규칙하게 대금이 지불되던 관행을 깬 사례로 주목 받기도 했다.

덕분에 거래처와 은행에 쌓인 빚을 모두 청산하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당시 은행이자가 높아 물품대금 지급을 관행적으로 늦추던 시대에 정기지급제도를 도입한 것은 당시 획기적인 발상이었다. 그것도 중소기업에서 마치 대기업에서나 시행할 법한 현금 결제를 상설화한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현금 결제 상설화로 신뢰 얻어
안 회장은 원자재를 공급하는 거래처에 현금을 주는 조건으로 제품 가격을 깎아서 6% 할인된 금액으로 자재를 사들였다. 제품에 납기를 철저히 지키고, 합리적인 가격까지 제시하니 한진화학의 거래처가 내실 있게 늘어나는 건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것은 곧 신용의 축적이었고, 신용은 곧 신뢰 자산으로 탈바꿈 했다. 유형의 자산보다 무형의 자산이 훨씬 가치있고 무서운 법이다.

한진화학이 부도 기업이 속출하던 1997년 외환위기 때도 굳건하게 자리를 지키며 오히려 수출 환차익으로 성장의 동력을 마련할 수 있었던 이유 역시 철저한 신용과 신뢰 덕분이었다.

안 회장은 기술혁신을 통한 환골탈태도 시도했다. 그는 선친이 그랬듯 새로운 도료 기술을 습득하기 위해 해외 시장의 문을 두드렸다. 미국의 유명 도료업체인 DEVOE를 찾아간 것도 이 때문이다.

안 회장은 위기의 순간에 중소기업이 살아남기 위해 반드시 대기업과 어깨를 나란히 해야 한다는 통찰력을 발휘했다.

한진화학은 안 회장의 경영 전략에 힘입어 건축용 도료에서 공업용 도료만을 전문적으로 생산하는 기업으로 특수시장을 선점하기 위해 노력과 도전을 거듭했다. 경쟁사들을 끊임없이 따돌리는 노하우로 ‘기술 혁신’을 강하게 어필했다. 1988년과 1989년도에 걸쳐 미국의 선박용 DEVOE와 기술제휴를 맺고 선박, 중방식도료 시장을 개척했다.

기존의 평범한 페인트 기업에서 공업용, 선박, 중방식용 특수도료 생산 기업으로 포지셔닝하자 한진기업을 보는 외부의 눈빛이 달라졌다. 노동집약적 시장인 페인트 제조 분야에서, 기술집약적 특수도료 생산기업으로의 발돋움은 완벽한 패러다임의 전환이었다.

탄탄한 기술력 갖춰 해외시장 진출
안 회장은 그해 자신감을 토대로 현대중공업과 35억원 규모의 계약을 따내게 되고, 회사를 성장시키는 발판을 마련했다. 그는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특수도료라는 틈새시장을 개척, 미국, 일본과 독일, 이탈리아 등 각국 글로벌 기업과의 기술 제휴로 가구용 도료 등의 특수도료 전문 기술을 확보했다. 이렇게 확보한 기술로 국내시장뿐 아니라 해외시장을 개척, 수출의 길까지 열어 젖혔다.

당시만 해도 원유를 수입해 만드는 페인트를 수출한다는 건 가격과 기술경쟁력 측면에서 불가능한 일로 여겨졌다. 하지만 안 회장은 차별화된 기술력을 토대로 원가절감을 이뤄내고 중국, 인도네시아 등 해외시장에서 실적을 올렸다.

이제 더 이상 한진화학을 ‘건축용 페인트를 만드는 공장’으로 기억하는 사람은 없다. 리더의 발상의 전환이 회사를 특수도료 전문 기업으로 탈바꿈시킨 것이다.

“우리는 다른 기업이 안 하는 제품만 만듭니다. 예를 들면 UV, 모바일, IT용 도료 등 특수도료죠. 신뢰경영을 토대로 기술력에 대한 경쟁력을 내세웠고, 세계적인 기업과의 거래로 기업 이미지를 새롭게 만든 것, 이것이야 말로 한진화학이 50년 넘게 버틴 원동력인 셈입니다.”

안 회장은 한진화학이 100년을 넘어 200년 이상 지속하는 기업으로 성장하기 위한 요소를 크게 3가지로 꼽는다. 첫째는 좋은 기술, 둘째는 좋은 사람,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신뢰 정신이다. 안 회장은 얼마 전 독일의 유명 자동차가 국내 연비를 속인 데서 촉발된 사태를 거울삼아 속이지 않는 신뢰의 정신만 있다면 어떤 기업이든 끝까지 살아남을 수 있다고 말한다.

■한진화학 2대 회장이 말하는 기업승계 5계명
1. 50~100년을 바라보고 경영한다
2. 경영이념인 신뢰중심으로 경영한다
3. 예의범절이 있는 기업풍토를 조성한다
4. 인간존중, 인화단결을 한다
5. 글로벌 경영을 지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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