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 페스티벌 284: 영웅본색 英雄本色

되돌아보면 어느 시대에서나 영웅을 필요로 했다. 그러나 지금의 대한민국만큼 절실했던 적이 있을까? 영웅이라는 단어가 거창하다면 지도자, 스승, 멘토 등으로 바꿔 생각해도 좋겠다. 문화역서울284(옛 서울역사)에서 다음달 4일까지 열리는 전시, 연극과 무용 공연, 영화 상영, 워크숍이 함께 하는 ‘페스티벌 284: 영웅본색 英雄本色’은 현 세태를 예측한 게 아닐까 싶을 만큼, 시의적절한 기획전이다.

처음 전시 제목을 접했을 때는 홍콩 누아르 대표작 <영웅본색> 시리즈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전시회인가 했다. 전시를 보니, 어두운 범죄 영화 분위기는 전혀 읽히지 않는, 영웅의 의미를 재점검하고 은유하고 조롱하고 해체하고 버리고 창조하는 장으로 다가온다.

8개국 24개 팀 70명의 작가가 다양한 영웅 상을 상상하도록 한 기획전으로 전체 관람가 등급이다.

그러나 ‘What a Wonderful World' 노래가 흐르는 가운데 우주소년 아톰 인형이 둥근 분쇄기에 갈려 가루가 되는 영상관(사진)을 찾은 아버지는 어린 아들 손을 끌며 황급히 빠져나간다. 아이들이 숭배하는 슈퍼맨과 같은 영웅 캐릭터가 머리에서 발끝까지 갈려 가루가 되는 걸 지켜보게 하는 건, 참혹하다 판단하실 수 있겠다. 이 영상은 신기운 작가의 ‘진실에 접근하기’인데, 작가는 그라인드 기법이 “모든 것은 땅에서 와서 땅으로 돌아간다”를, 그래서 “사라진다는 것, 존재한다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한 물음을 던지기 위한 것이라 한다.

옛 역사 안으로 들어서면, 천장 높은 로비를 압도하는 권오상의 입체 사진 조각상들이 보인다. 다각도로 촬영한 평면 사진 수백장을 이어붙인 박찬호, 김혜자와 같은 유명 인물 전신상에서부터 평범한 인물 상반신이 관객을 내려다보고 있다. 하얗고 높은 좌대에 올라 선 우리 시대 영웅으로 볼 수도 있지만, 어느 각도로 봐도 어색한 표정이 말해주듯 올려다보는 우리 시선은 영웅의 일면만 보게 되니, 파편적 영웅이라는 뜻으로도 읽힌다.

성유삼 작가는 신전 기둥과 승리의 여신 니케 조각상을 스펀지로 재현해놨다. 아름답고 당당한 니케상에 가까이 가보니 흰 스폰지 결이 거칠게 보이고, 신전 기둥 역시 색색의 스폰지를 쌓은 것임을 확인하게 된다. 돌로 조각됐던 상징물을 가벼운 스폰지로 만든 의도는 누구든 짐작할 수 있겠다.

도슨트 설명 시간에 맞추지 못하면 지킴이들에게 설명을 청해도 되는데, 연두색 조끼를 입은 지킴이들이 너무 많고, 지나치게 친절하게 소리 내어 인사하는 통에 오히려 감상에 방해되는 측면이 있다. 그리 어려운 전시가 아니니, 스스로 생각해보고 사진도 찍으며 즐기길 권한다.

‘놀공’의 관객 참여형 공연 ‘파우스트 되기’와 희극 ‘우리는 브론테’ 등이 대합실 무대에 오르고, <사브리나> <대부> <스팅> 등의 영화도 상영된다.

아쉬운 건 영화 목록이 할리우드 일색인데다, ‘영웅본색’이란 전시 제목에 견강부회한 작품도 적지 않다는 것, 그리고 상영 공간이 극장처럼 편하지 않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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