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소기업청은 최근 개청 8주년 행사의 하나로 ‘중소기업사랑, 청소년 글짓기 공모전’을 개최, 김하늬 양(진명여고 2) 등 37명의 작품을 선정해 포상했다. 본지는 때 묻지않은 청소년들의 시각으로 ‘중소기업에 대한 사회적 편견’과 ‘청년실업난의 모순’등을 솔직하고도 재미있게 묘사해낸 이들의 글을 연재한다. 편집자주

언젠가 아버지의 눈물을 본 적이 있었다. 내가 초등학교 2~3학년 때 일로 기억된다. 그 당시 나는 어린 나이였기에 아버지가 왜 그렇게 쓸쓸한 표정으로 해질녘, 베란다에 나가 담배연기를 푸우푸 뿜어내다가 눈에 이슬을 매달았는지를 몰랐다. 아버지는 내게 있어 늘 위엄 있고 남자다운 분이었기에 나는 그저 그런 아버지의 모습에 의아해 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얼마전, 아버지의 일과 삶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됐다.
지난 가을 아버지와 산에 오른 적이 있었다. 아버지는 그 날 산 중턱에 이르자 내게 “힘들지? 쉬어 가자”며 잔물방울이 송글송글 맺힌 물병을 건넸다. 나는 목이 마르던 참에 아버지가 건네준 물을 벌컥벌컥 들이마시며 풀밭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러나 막상 아버지 옆에 나란히 앉고 보니 친근한 부자 간이라 해도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나는 이때다 하는 생각에 아버지의 회사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다고 했다. 그 이유는 아버지의 사업관이나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 등을 배우고 싶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몇 해 전, 온 나라를 위기로 몰고 갔던 IMF 시기에도 끄떡없이 버틸 수 있었던 아버지 회사의 건재함에 대해 묻고 싶었던 것이다. 아버지는 나의 물음에 한 편의 인간극장을 연출하듯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아버지의 이야기는 이십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아버지는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인이 되자 취업에 대한 어려움을 겪다가 아는 분의 소개로 그다지 규모가 크진 않지만, 그렇다고 해 소규모 회사도 아닌 중소기업에 입사했다.

중소제조업체 직원으로 입사

아버지가 입사한 회사는 물건을 생산해 내는 제조업체였다. 인문학도였던 아버지는 회사생활에 낙후될 것이 두려워 다른 사원들이 퇴근해 돌아간 시간에도 자리에 남아 수천 수만가지가 되는 제조품목의 생산과정과 용도를 익히는 데 전념했다고 한다. 이러한 아버지의 성실함은 드디어 인정을 받게 되고 입사 후, 5년 만에 부장으로까지 승진하게 됐다.
그러나 아버지의 꿈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아버지 나름대로의 사업관과 경영방침을 바탕으로 한 회사를 갖고 싶어했다. 처음에는 과연 우리나라에서 중소기업이 잘 버텨나갈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도 있었으나 그간의 회사 경력과 굳은 의지로 지난 1989년 4월, 아버지는 드디어 회사를 설립하게 된다. 그 회사는 바로 아버지가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는 전문 제조업체인데 아버지 회사의 취급품목은 바로 자동차 및 전자부품, 의료기기, 고무, 특수 RUBBER 등을 제조하는 일이다.

창업후엔 1인 5역 수행

그런데 지금은 아버지의 회사가 부흥해 기계도 많아지고 직원도 늘고 회사의 면적 또한 넓어졌지만 회사 창립 당시에는 말 그대로 작은 공장이었다고 한다. 직원은 열 명 남짓했고 기계도 여러 대 되지 않았다. 새로 시작한 사업의 인건비를 줄이기 위해 아버지는 혼자서 회사의 생산일에 직접 참여함은 물론, 영업과 납품 등 1인 5역을 했다고 한다.
그러니 자연 아버지의 생활은 눈코뜰 새가 없이 바빴는데 그로 인해 한 번은 교통사고가 나서 큰 손해를 본 적이 있었다고 한다. 그날도 몹시 분주한 가운데 급한 나머지 자동차 페달을 급속으로 밟은 것이 원인이 돼 앞차와의 충돌로 아버지는 늑골과 다리를 심하게 다쳐 병원에 입원하게 됐다. 그로 인해 납품이 확실시되던 업체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하게 돼 거래선이 끊겼다. 그럼에도 아버지는 얼마 후, 아픈 몸을 이끌고 병원에서의 만류를 뿌리친 채 미리 퇴원해 다시 일을 시작했다.
아버지는 손수 물건을 봉고차에 싣고 물건 주문 회사에 납품을 다녔고, 일손의 부족을 채우기 위해 외부에 부업을 맡기는 외주 일도 했는데 그 일은 가정집을 돌며 부업제품을 가져다 주고 수거를 하는 일이었다.
아버지는 그렇게 직접 아파트며 주택가를 돌며 무거운 물건을 어깨에 메고 높은 계단과 가파른 언덕을 오르내렸는데 어느날은 길바닥에 넘어져 무릎에 피멍이 들기도 했다.
아버지는 그 일만이 아니라 직장생활을 하던 때의 양복은 던져버리고 점퍼 차림으로 물건을 세척하거나 포장하는 일 등도 직접 했다. 아버지는 또 비가 오는 날이나 눈보라 치는 날에도 거래선을 찾아다니며 납품처를 확보하는데 전력했다.
이런 과정들을 말하면서 아버지는 말했다. “사는 것이 때론 힘에 겨웠지만 그것을 견디다 보면 힘든 일도 익숙해지고 보람도 느낀다”라고. 나는 아버지의 말을 들으며 한 단어를 떠올렸다. 그것은 ‘집념’이었다. 아버지의 집념은 아버지의 회사를 굳건히 하는데 밑거름이 됐고 우리 가족의 행복과 나아가서는 국가의 산업발전에 한 몫을 했다는 생각이 든다.

납품대금 떼여도 상대방 배려

IMF 때는 거래하던 몇몇 회사의 부도로 인해 물품대금을 받지 못한 적도 있었지만 아버지는 그때에도 의연한 모습을 보여 주었다. 아버지는 물품 대금을 받지 못하는 마음보다 부도를 맞아 회사의 문을 닫아야 하는 그들이 더욱 안타깝다며 중소기업의 꾸준한 발전과 존립을 위한 방법이 모색돼야 한다고 내게 말했었다.
현재 아버지의 회사는 남들이 쉬고 있는 밤에도 야간작업으로 기계가 멈추지 않고 있다. 또한 아버지의 회사는 ISO 인정 회사이다. 납품량이 늘어나니 자연 생산량도 늘게 돼 기계의 양과 월수입이 늘고 있다. 한마디로 아버지의 회사는 승승장구했고 이제는 어떠한 비바람에도 절대 흔들리지 않는 탄탄한 중소기업으로 자리매김된 것이다.

번 돈은 사회로 환원시켜

아버지를 두고 주변의 어른들이 하는 말이 있다. ‘타고난 사업가’라고. 나는 이 말에 공감하면서도 그 말 보다는 아버지의 끊임없는 노력과 회사에 대한 열정, 그리고 어려운 현실 속에서도 끝까지 살아남으려는 인내와 감춰진 눈물이 있었기에 지금의 회사로 번창했다는 생각이 든다. 젊은 날의 아버지 구두 위엔 언제나 먼지가 뽀얗게 앉아 있었고, 손바닥은 늘 터지고 갈라진 채였다. 이유는 바쁜 일과로 인해 구두 한 번 닦을 시간적 여유가 없었고, 화공약품을 그대로 손에 묻히고 일을 했던 때문이리라.
아버지는 가끔씩 말씀하신다. “내가 번 돈은 이 사회가 벌어준 돈이다. 더러는 피땀 흘려 번 돈이기에 애착도 가지만 언젠가는 이 사회를 위해 환원하리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나는 아버지의 그 말씀을 들으며 삶의 진정한 의미와 성실한 사업가로 살아가고 있는 아버지에 대한 존경심을 가슴에 싹 틔우곤 한다.
그러나 내가 아버지를 존경하는 이유가 또 있다. 아버지는 따뜻한 인정을 베풀고 있는 분이다. 그중의 하나가 아버지의 인간적인 면모다.
아버지는 회사에 심신 장애인을 고용하고 있다. 그들 중엔 말을 못하는 이도 있고 다리가 불편한 이들도 있다. 아버지는 또 불우이웃돕기에도 앞장서고 있다. 매달 불우이웃 성금을 송금하는 것은 물론, 작년에는 농아들의 학교인 자혜학교에 청소기 등 필요 물품을 기증했다. 정월 대보름의 둥근 달 속에 아버지의 환한 얼굴이 비치고 있다. 밤하늘에 빛나는 별처럼 늘 내 곁을 환히 비춰주는 내 삶의 거울과도 같은 아버지, 나는 이런 아버지를 존경하고 마음 깊이 사랑한다.

■금 상=김 영 호
효원고등학교 2학년 4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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