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탄핵과 총선 정국으로 온 나라가 시끄럽다. 국론이 분열되고 모든 단체와 기업의 구성원들이 제각각 쪼개져 분열되니 가슴 아픈 일이다. 도대체 정치가 무엇인가.
단지 정치적 견해가 다르다고 해서 어제까지 우애 있게 지내던 동료, 선후배, 직장상사, 사제관계까지 허물고 대들고 비방한다는 말인가. 우리가 소중하게 지켜야 할 가치관을 망가트리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이번 총선에서 각 당이 민생경제와 개혁을 내세우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변화와 개혁이 시대적 요구라는 점을 부정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각 정당이 생각하는 개혁이 정치적 판단에 치우친 것이 아닌가, 진정한 혁신이 무엇인가를 한번 따져볼 필요가 있다. 물론 정치인들이 잘해야 한다. 그렇지만 정치인이 모든 일을 다 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단지 인프라를 담당할 뿐이다.
진정한 혁신이란 무엇인가? 기업가적 판단으로 시장기회를 발굴하는 것이다. 글로벌 스탠더드에 다가가는 일이다. 고객(시민)에게 새로운 방법으로 다가가는 일이다. 데모나 행진 같은 방법으로 시민사회를 이룰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행정부와 국회는 스스로를 개혁하는 일만 하면 된다. 20세기 낡은 모델에 따르지 말고 빨리 신경제와 기업경영 마인드를 배워야 한다.

정치도 기업마인드 도입해야
세계는 신경제를 향해 질주하고 있다. 신경제에서는 대통령이나 국회나 공무원이 아니라 바로 혁신적 기업가(entrepreneur)들이 개혁의 주도세력이 되고 존경을 받는다. 시민사회의 참다운 의미도 여기에 있다. 신경제는 지식경영이고 네트워크 경영이고 공동체경영이다. 경쟁만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경쟁과 제휴협력을 함께 강조한다. 업종의 경계선을 초월해 파트너를 찾고 연결한다. 고객(시민)과 파트너가 평가할 가치를 항상 생각하고 치밀하게 조사하고 수시로 모니터한다. 기민성, 활기, 혁신의 문화를 향한다. 철저하게 평가하고 스스로 반성한다.
이를 알고 실행하는 참다운 진보세력이 우리 사회에 있는가? 현재의 세계조류를 보면 사회주의는 지키기에 급급한 보수세력으로 전락했다. 신경제야말로 참다운 진보이다. 그런데 한반도에서는 공평한 분배 등 사회주의적 개혁을 진보라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많은 듯 하다.

신경제가 참다운 ‘진보’
어제는 기독교의 부활절이었다. 예수가 십자가에 달려 가장 잔인한 죽음을 당했던 사건에서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예수의 사형 죄목은 자기가 왕이라고 말했다는 것이었다. 예수를 정치범으로 몰아 사형시킨 어처구니없는 사건의 내면에는 대중의 정치 콤플렉스가 있었다.
오늘날 우리들도 은연중에 정치 콤플렉스에 빠져 정치적 구세주를 갈망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미안한 말이지만 정치적 구세주는 없다.
지나치게 첨단산업에만 의존하는 것도 잘못이다. 그 때문에 기존 산업과 경영혁신을 경시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미국경제가 운명적인 콘드라티예프 사이클의 불황기를 호황기로 바꿀 수 있었던 원동력은 하이테크가 아니라 로우테크(low-tech), 지극히 평범한 관리자들이 엄청난 혁신을 했기 때문이었다고 피터 드러커는 지적한 바 있다.
우리의 진정한 보루는 시민사회를 대표하는 3백만 중소기업들이고 진정한 개혁은 리엔지니어링, 품질경영, e-Business 등 오로지 기업가적 역량과 의욕에 의해 이뤄질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보수든 진보든 지켜야 할 것과 고쳐야 할 것을 현명하게 구분해야 한다. 정치과열을 냉각시키고 차분하게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자.

이 재 관
숭실대학교 경영학과 교수
jklee@ssu.ac.kr

저작권자 © 중소기업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