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도 비즈니스도 ‘새롭고 낯선 시선’, 곧 혁신이 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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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도 비즈니스도 ‘새롭고 낯선 시선’, 곧 혁신이 답이다
  • 중소기업뉴스
  • 호수 2267
  • 승인 2020.06.08 1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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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O, 미술 속에서 길을 찾다] 아트 마케팅

코로나19로 인해 경제·사회·문화계 전반이 흔들리고 재정립되는 시기다. 특히 중소기업들은 당장 몇 개월 뒤의 시장 환경도 예상할 수 없는 시계제로에 빠졌다. 기존의 마케팅, 시장분석, 디자인 등의 경영전략으론 대응하기 점점 힘들어지고 있다. 이럴 때 일수록 과거의 성공방식을 버리고 새롭고 낯선 시선으로 자신들의 비즈니스를 점검해야 한다. 이에 중소기업뉴스가 서정아트센터와 공동기획으로 미술을 통해 배울 수 있는 인사이트를 격주로 연재한다. <편집자 주>

 

존 에버렛 밀레이(John Everett Millais, 1829-1896), (오필리아 Ophelia)(1851)
존 에버렛 밀레이(John Everett Millais, 1829-1896), (오필리아 Ophelia)(1851)

우리가 명화라 부르는 많은 작품들 중에는 실제 사물과 구분할 수 없을 정도의 묘사가 돋보이는 정물화가 있는가 하면, 알아보기 힘든 형체로 화면을 채운 그림도 있다. 뿐만 아니라 화려한 원색 물감이 흩뿌려진 캔버스부터 역동적인 조각, 대량 생산되는 현대 미술의 팝아트까지 그 종류는 다양하다. 현재까지 미술 양식은 끊임없이 새로운 것에 대해 고민하고 변화를 갈망하는 선구자들에 의해 다양한 변주로 나타나 발전을 거듭할 수 있었다.

그러나 새로운 양식의 등장이 사람들에게 늘 환영받았던 것은 아니다. 당시에는 너무도 파격적이라 여겨져 반감을 사기도 하고, 화단에서 조롱당하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그런 어려움 속에서 자신의 독창성을 믿고 철학을 관철시킨 예술가들은 후대에 작품의 가치를 인정받아 역사의 한 획을 그으며 미술의 발전에 기여했다.

그렇다면 예술가들은 어떻게 틀에 박힌 방식이나 태도를 벗어날 수 있었을까. 독창성에 대한 고민은 예술뿐만 아니라 창의적인 발상과 혁신이 요구되는 현시대 기업 경영인들에게도 해당한다. 시대가 빠르게 변화할수록 자유로운 예술가적 마인드가 요구되는 지금, 몇몇 예술가들이 어떤 생각과 의지를 가지고 작품을 생산했는지 보면, 그 안에 해답이 있을지도 모른다.

 

무엇을 그리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색면추상 화가 바넷뉴먼(Barnett Newman), (하나임1, Onement, I)(1948)
색면추상 화가 바넷뉴먼(Barnett Newman), (하나임1, Onement, I)(1948)

캔버스 한가운데 찍힌 점 하나, 가장 기본적인 도형으로만 이뤄진 캔버스를 보면서 우리는 그 어떤 대상도 떠올리기 힘들어 난해할 때가 있다. 현대미술이 불친절하게 느껴지는 이유 중 하나는 그리는 대상이 재현의 영역을 벗어났기 때문이다.

미국의 추상표현주의 화가 바넷뉴먼(Barnett Newman, 1905-1970)의 작품 <하나임1, Onement, I>(1948)을 보면 특정 사물이나 인물을 그린 것이 아니라서 그림을 해석할 요소가 충분하지 않다. 작품에 관한 배경 지식이 없는 채로 관람자가 전시회에서 이 그림을 본다면 여기서 무엇을 읽어내란 말인가라며 의문을 품을 수도 있다.

바넷뉴먼은 1948년에 쓴 에세이 <숭고는 지금 The Sublime is Now>에서 아름다움은 형태에서 오고 형태는 윤곽이며 윤곽은 유한하다고 언급한다. 즉 회화라는 유한한 매체로 아름다움을 담는 데에 한계를 느꼈던 그는 자신이 나타내고자 했던 숭고의 정신을 표현하기 위한 방법으로 추상화를 택한 것이다. 공허한 빈 캔버스를 바라보며 가슴을 울리는 전율이 느껴졌다면 그것은 뉴먼이 의도한 대로 프레임을 벗어난 직관적인 아름다움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습관적으로 그림 속에서 재현의 대상을 찾으려 하고, 해석적 코드를 발견하려고 한다.

뉴먼이 다소 정적인 분위기와 차분한 색채로 숭고를 표현했다면, 러시아 추상화가 바실리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 1866-1944)는 조형적 요소를 활용해 관람자의 감각을 자극하려고 했다. 그는 음악을 가장 최상의 예술 형태라 여기며 회화도 음악을 닮아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음악이 특정 소리를 따라하지 않고도 듣는 사람에게 감정의 동요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청기사파의 창시자 바실리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 (여러개의 원 Several Circles)(1926)
청기사파의 창시자 바실리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 (여러개의 원 Several Circles)(1926)

예컨대 우리는 음악을 들으면 듣는 즉시 청각으로 느끼는 반면, 미술 작품을 감상할 때는 그 작품이 가진 서사를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화가가 무엇을 그렸는지 분석하느라 온전한 감각으로 작품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다.

음악이 가진 특성을 따라갈 방법을 강구한 결과 칸딘스키의 작품은 점, , , 그리고 색채만으로 구성돼 더 이상 원근법 따위는 발견할 수 없게 됐다. 어떠한 환영도, 서사도 사라진 작품에서 남은 건 2차원의 평면 캔버스였다. 특정 대상을 묘사하는 행위 자체를 작품과 관람자 사이에 놓인 벽으로 느낀 칸딘스키의 발상은 현재까지도 곳곳에 남았다. 시각과 청각, 심지어 후각까지 전시의 주제로 끌어들인 기획은 하나의 유행으로 자리 잡았으며, 이는 능동적인 관람 태도를 요구하는 체험형 전시로 발전하기도 한다.

그러나 정체된 미술이 가진 한계를 극복하고자 시도했던 참신함이 당시에는 참신함으로 인정받기 어려웠다. 오히려 찬사보다는 과연 아름다운가?’라는 의구심을 낳을 때가 많았다. 바넷뉴먼과 칸딘스키의 작품과 같이 명확한 재현 대상이 사라져버린 추상화의 역사는 20세기가 돼서야 시작됐다. 잘 그리는 기술만이 중요했던 시기는 19세기 등장한 사진으로 인해 마침표를 찍게 됐고, 이에 따라 많은 예술가는 대상을 해체하고, 재조합하는 등 계속해서 새로운 화풍을 시도하기 시작했다. 색채의 파괴, 형태의 파괴와 같은 시도들이 당대에는 환영받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여행지에서 유명 미술관을 방문해 익숙한 명화를 감상할 때를 떠올려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19세기 이전의 작품들은 신화나 문학을 소재로 한 작품이 대부분이다.

그리스 로마 신화 중 한 장면을 연출하거나 당시 유행했던 문학을 그대로 차용해 시각화하는 등 친근한 등장인물과 이야기가 캔버스 안에 3차원의 환영으로 나타난다. 화가의 성향에 따라 그림에서 보이는 분위기나 구성이 완전히 달라질지라도 원래 존재했던 이야기를 근간으로 했기에 해석할 코드는 이미 마련됐다.

그렇다고 타성에 젖은 채 새로운 양식을 창안하기보다 계속해서 구상회화만을 그리는 화가들만 넘쳤다면 모두가 매너리즘에 빠져 아무런 발전도 없었을 것이다. 비평계를 뜨겁게 달군 새로운 양식에 관한 담론도, 미술사 계보에 정리된 다양한 사조도 선구자들이 시행착오로 빚어낸 결과물이다.

 

아르망 피에르 페르난데즈(Armand Pierre Ferandez 1928-2005), (장기주차, Long-term Parking)(1982)
아르망 피에르 페르난데즈(Armand Pierre Ferandez 1928-2005), (장기주차, Long-term Parking)(1982)

예술가는 시대의 증인

그렇다면 참신함을 판단하는 것은 누구의 몫인가. 프랑스 출신의 미국 화가이자 조각가 아르망(Arman, 1928-2005)은 미술가를 두고 자신이 사는 시대의 증인이 돼야 한다고 말한다. 아르망은 고급 악기들을 부수거나 태워서 그 조각들을 다시 캔버스나 상자 속에 축적하는 작업을 통해 부르주아 미술에 반기를 든다. 평범한 일상용품들이 그의 손을 통해 축적되는 과정에서 제 기능을 상실해버리는 상황은 우리의 소비사회와 정서를 보여주는 거울이다. 사회에서의 축적은 그야말로 대량생산돼 쌓이는 물건들, 끊임없이 쌓이는 쓰레기들을 연상하게 하기 때문이다.

아르망의 주장대로라면 작품은 아름답지 않아도 된다. 보는 사람에 따라 단지 충격 요법을 위해서 심미적이기를 포기한 작품으로도 비칠 것이다. 하지만 그는 사물들을 나름의 질서대로 배열하고 축적해 조형적 가치도 함께 창출한다.

 

더 이상 새로울 것이 없다고 느껴진다면

창의성과 독창성이 끊임없이 요구되는 예술계에서 더 이상 새로울 것이 없다는 진단이 시대마다 있었다는 사실은 아이러니한 부분이다. 사람들을 놀라게 할 만한 예술적 시도는 없어진 지 오래며 예술은 정체기를 걷게 됐다는 비평이 항상 있었던 것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술은 항상 과도기를 지나 새로운 양식을 탄생시켰다.

이미 진부해져 버린 팝아트가 한때는 뜨거운 예술 담론의 중심에 있었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면, 정체기라 부르는 시기는 새로운 것을 맞이할 준비 기간일 수도 있다. 모방과 대량생산에 대한 비판적인 시선이 걷히고 나니 지금은 원색적인 색감과 대중적인 아이콘을 소재 삼은 작품들이 모두 팝아트라는 범주에 묶일 만큼 익숙해졌다. 이러한 사례들만 보더라도 우리는 천천히 새로워지고 있다. 앞으로의 전시 동향을 내다보는 것은 지난 양식들을 평가하고 재해석하고 발굴하는 것만큼 중요해 보인다.

혁신이 필요할 때, 과감한 시도만이 정답일까? 변화를 위한 변화는 반드시 성공하리란 보장이 있을까? 후대의 평가만을 기다리며 당시에는 인정받지 못해도 괜찮은 것인지 역사 속에 잠든 예술가들에게 질문을 던져본다.

 

- 글 이윤정 서정아트센터 큐레이터 / 진행 이권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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