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 25일(현지시간) 미국 로스앤젤레스(LA) 유니언 스테이션에서 열린 제93회 아카데미상 시상식에서 영화 ‘미나리’로 여우조연상을 받은 배우 윤여정이 트로피를 들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언어·인종 장벽 넘어 오스카 거머쥔 윤여정

아시다시피 저는 한국에서 왔고, 제 이름은 윤여정입니다. 유럽의 많은 분들이 제 이름을 여영이라거나 유정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오늘만큼은 여러분 모두 용서하겠습니다.”

현지시간으로 지난 25,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제93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장에 웃음소리가 퍼졌다. 영화 미나리로 여우조연상을 거머쥔 배우 윤여정이 재치있는 수상소감으로 장내 분위기를 밝힌 것이다.

여우조연상 시상자인 브래드 피트의 호명 후, 화면에 비친 윤여정은 가슴 벅찬 표정을 지으면서도 이내 차분하게 드레스를 감싸쥐고 시상대로 향했다. 여우조연상 후보로 경쟁했던 다른 배우들에게 가벼운 목례도 잊지 않았다.

시상식이 열리기 전부터 윤여정의 여우조연상 수상은 일찍이 점쳐졌다. ‘미나리의 순자 역으로 후보에 오른 윤여정의 연기는 가히 압도적이었다. 앞선 제74회 영국 아카데미, 27회 미국배우조합상, 전미 비평가위원회, 골드 리스트 시상식, 선셋 필름 서클어워즈 등에서 세계적인 배우들을 제치고 30개가 넘는 상을 들어올렸다.

거의 100%에 가까운 수상 확률에도, 시상식을 지켜보는 사람들은 끝까지 눈을 떼지 못했다. 102년 한국 영화사 최초의 아카데미 연기상 수상이라는 역사가 기록되는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윤여정의 이름이 불리고 단상에 올라선 그에게서 일순 긴장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곧바로 특유의 위트 있는 입담으로 떨리는 마음을 가다듬고 장내에 웃음을 선사했다.

브래드 피트, 드디어 우리가 만났네요. 털사에서 우리가 영화를 찍을 때 어디에 계셨나요. 만나서 정말 영광입니다.”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은 그간 좋게 말해서 보수적이고, 있는 그대로 표현하자면 백인들만의 리그라 불릴만큼 인종 편향적이라는 평을 받아왔다. 이와 같은 영화제에서 언어와 인종의 장벽을 넘어 한국인 최초의 수상자로 지목받았다는 사실은 한국 영화사에 길이 남을 일이다. 그럼에도 윤여정은 기쁨에 심취하기보다 겸양을 발휘하며 다른 후보 배우들에 대한 존경과 함께 영광을 나눴다.

“5명 후보가 모두 각자 다른 영화에서의 수상자입니다. 우리는 각자 다른 역을 연기했잖아요. 우리끼리 경쟁할 순 없습니다. 오늘 제가 여기에 있는 것은 단지 조금 더 운이 좋았을 뿐이죠.”

윤여정과 함께 여우조연상 후보에 오른 배우 아만다 사이프리드는 꾸밈없지만 진심이 가득 담긴 그의 소감에 감동한 표정을 짓기도 했다.

 

사진 왼쪽부터 영화 ‘미나리’ ‘산나물처녀’ ‘죽여주는 여자’ 데뷔작 ‘화녀’ 스틸컷.
사진 왼쪽부터 영화 ‘미나리’ ‘산나물처녀’ ‘죽여주는 여자’ 데뷔작 ‘화녀’ 스틸컷.

윤여정의 배우 인생 56

파격 캐릭터부터 서정적 인물까지… 폭넓은 연기 스펙트럼이 돋보이는 필모그래피

저는 이 상을 저의 첫번째 감독님, 김기영에게 바치고 싶습니다. 아주 천재적인 분이셨고 제 데뷔작을 함께 했습니다. 살아계셨다면 아주 기뻐하셨을 거예요.”

윤여정은 수상 소감 말미에 화녀(1971)’로 영화 데뷔를 이끌어준 김기영 감독을 언급했다. 영화 영화 하녀로 유명한 김기영 감독은 독보적인 개성의 미장센과 인물 해석, 연기 연출 등으로 한국 영화사를 빛낸 거장 중 거장으로 손꼽힌다.

남다른 안목을 지닌 김기영 감독은 화녀의 여자 주인공으로 신인이었던 윤여정을 낙점했다. 6-70년대 인기를 끌었던 고전적인 외모의 배우들 사이에서 도회적 이미지가 물씬 풍기는 윤여정이 눈에 들어온 것이다. 김기영 감독은 본인의 작품과 같이 고전성을 탈피해 새 시대의 가치관을 대변할 배우로 윤여정만한 배우가 없다고 판단했고, 그 판단은 옳았다.

화녀는 시골에서 상경해 식모살이를 하는 명자(윤여정)가 집주인 동식(남궁원)과 불륜에 빠지며 파국으로 치닫는 이야기를 그린 영화다. 여기서 윤여정은 첫 스크린 데뷔라는 사실이 무색할 정도로 욕망에 가득 찬 주인공 명자 역을 완벽히 소화했다.

또 지금 봐도 모던하다는 인상을 줄만큼 시대를 앞서간 연기를 펼치기도 했다. 해당 작품으로 제10회 대종상 신인여우상을, 4회 시체스국제영화제와 제8회 청룡영화상에서는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며 연기력을 인정받았다.  이후 충녀(1972)’에미(1985)’를 통해 악녀와 순수한 여인의 사이를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연기를 구사하며, 당시 한국 영화사에서 볼 수 없던 입체적인 캐릭터를 선보였다는 평을 받았다.

2000년에 들어 바람난 가족(2003)’ ‘여배우들(2009)’‘하하하(2010)’를 거쳐 하녀(2010)’로 다시 국내 영화제의 여우조연상을 휩쓸었다. 그리고 돈의 맛(2012)’‘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2015)’‘계춘할망(2016)’‘죽여주는 여자(2016)’ 등에 이어 올해 미나리까지, 주조연 가리지 않고 매력적인 역할들에 도전하며 자신만의 필모그래피를 구축했다.

 

연기력만큼 빛나는 인간미어록뛰어넘는 행동파 면모로 매력 만점

드라마와 영화, 주연과 조연을 넘나들며 새로운 역할을 마다하지 않던 윤여정은 2013년 예능에도 발을 들여놓기 시작했다. 2013년 방영된 tvN꽃보다 누나에 출연하면서부터다. 그간 브라운관과 스크린을 통해 날카로운 연기를 보이던 모습은 온데간데 없고 허당미 넘치는 인간적인 모습으로 시청자들의 호응을 얻었다.

특히 현실적이면서도 인생을 따뜻하게 바라보는 시선이 묻어나는 그의 말들은 최근에 와서 어록으로 불리며 회자될 정도다. 더불어 일흔의 나이에도 그래, 내가 지금 아니면 이걸 언제 해보겠니라며 새로운 도전을 멈추지 않는 윤여정의 모습에 긍정적인 자극을 받는다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가 전하는 울림을 알아차린 tvN의 나영석 피디는 꽃보다 누나이후 윤여정을 필두로 한 윤식당 시즌 1, 2’, ‘윤스테이등 총 3편의 예능 프로그램을 추가로 선보였다. 해당 프로그램들 또한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며 늘 새로운 여정을 마다치 않는 윤여정의 필모그래피에 날개를 달았다.

 

너무 ‘1’, ‘최고그러지 말고, 우리 그냥 다 같이 최중만 하고 살면 안돼요?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 직후 가진 한국 기자들과의 회견 자리에서 지금이 최고의 순간인 것 같냐는 어느 기자의 질문에 윤여정은 이와 같이 답했다.  이어 앞으로의 계획을 묻는 기자들의 질문엔 없다고 잘라 말했다. “아카데미상 이후에도 달라지는 것은 없다고 전한 윤여정은 다만, “(대본을 못 외워서) 남에게 민폐가 되지 않을 때까지는 이 일을 하다가 죽으면 좋겠다는 말로 연기에 대한 애정과 의지를 드러냈다.

한편, 윤여정의 아카데미상 수상에 그의 데뷔작인 화녀50년만에 재개봉한다는 소식을 전했다.

각종 방송사에서는 그가 출연한 드라마와 영화의 다시보기 서비스를 제공하기에 나섰다. 2~30대 구매층이 주를 이루는 쇼핑 어플리케이션의 광고 모델로도 기용됐다. 이혼 후 두 아들 양육을 위해 생계형 배우가 돼야만 했다던, 과거의 윤여정은 오늘을 예상이라도 했을까? 배우 인생 56, 그리고 일흔 넷의 윤여정. 그의 다채로운 여정은 여전히 순항 중이다.

 

- 신다솜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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