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완 변호사 (김앤장 법률사무소)
김태완 변호사 (김앤장 법률사무소)

조선 명종 대의 이야기다. 장성에서 태어난 아곡 박수량은 24세에 과거 급제하고 부모의 시묘살이 기간을 제외한 38년 동안 관직생활을 했다. 벼슬이 지금의 서울시장인 한성부 판윤과 지금의 장관인 판서에 이르렀으나 가난하기 이를 데 없이 청빈하게 살았다. 명종은 아곡의 청빈함을 듣고 암행어사를 보내 사실을 확인했다. 어사는 어머님과 살고 있는 집안 굴뚝에서 연기 나지 않는 날이 한 달에 반이 될 정도로 부를 탐하지 않고 청빈하게 살고 있다고 보고했다. 이 얘기를 들은 명종은 아흔 아홉 칸의 집을 지어 청백당(淸白堂)이란 이름과 함께 하사하였다.

아곡은 죽는 날에도 묘를 크게 쓰지 말고 비석도 세우지 말라 유언했고 자손도 이를 따르려 했다. 이를 딱히 여긴 명종은 서해의 귀한 흰 돌을 골라 하사하면서 아곡의 묘비에 글을 새김은 고인의 청렴한 삶을 그르칠 수 있으므로 비문 없이 세우라고 했다. 장성 호산에 있는 아곡의 묘비는 지금도 글이 없는 백비(白碑)로 남아 있다.

청백리는 조선시대 청렴한 공직을 장려할 목적으로 실시한 제도다. 아곡은 황의, 맹사성과 함께 감사원이 선정한 3대 청백리 중 한 분이다. 이처럼 청렴은 공직사회 부패를 예방하고 신뢰를 제고하는 주요 덕목이었지만, 공공조달에서는 청렴계약서또는 청렴이행각서라는 이름으로 참여업체에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약정 사항이 되고 있다.

정부는 201212월 국가계약법 제5조의2를 신설하며 청렴계약의 근거를 계약 예규에서 법률로 상향했다. 주계약과 별도로 공공조달에 참여하는 입찰자 또는 계약상대자가 입찰·낙찰 등 계약체결 과정에서 금품을 수수하거나 담합하지 않기로 약속하고 이를 위반할 경우 입찰·낙찰을 취소하거나 계약을 해제하도록 하는 부수 약정으로 기능하고 있다. 조달에 참여하는 업체들은 한 장으로 간략히 구성된 청렴계약서의 내용을 크게 신경쓰지 않고 클릭 한번으로 제출한 후 입찰에 참여하고 있지만 가볍게 봐선 안되는 중요한 의미가 있음을 간과하고 있는 것이다.

우선 뇌물수수와 담합은 청렴계약 사항인 동시에 부정당업자 제재 사유다. 부정당업자 제재는 장래의 입찰참여 또는 계약체결을 금지할 뿐 이미 체결된 계약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는 반면 청렴계약 위반은 이미 계약이 체결된 경우에도 위반 행위와 관련된 계약이라면 해제, 해지가 가능하다. 즉 담합에 대한 부정당업자 제재로 장래의 입찰참여와 계약체결을 제한받는 것과 별개로 이미 체결돼 이행 중인 계약도 파기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규제 확대로 인해 발주기관 역시 기존 계약을 파기하고 새로운 조달 업체를 선정해야 하는 행정상 불편에 대한 비판적 시각도 존재하지만 공공조달의 투명성을 확보하겠다는 정부의 의지는 아직 변함이 없다.

오히려 규제 내용을 확대해 청렴계약 준수정도를 계약이행 성실도 평가요소에 반영하고, 2016년부터는 담합행위가 있는 경우 입찰자에게 입찰금액의 5%, 계약상대자에게 계약금액 10%를 한도로 손해를 배상토록 하는 내용을 추가했다.

담합으로 발생한 손해를 발주기관이 입증해야 하는 소송상 불편을 피하기 위한 의도이나 실제로 손해가 발생하지 않거나 손해액을 산정하기 어려운 사안에 대해서도 획일적으로 손해배상을 고지해 민사적 분쟁을 제도화시킨다는 시각도 있다.

정부가 청렴계약 체결과 이를 위반한 업체에 대한 규제를 법률에 명시한 것은 입찰서와 함께 제출하는 청렴계약서 한 장이 단순한 종이 조각이 아님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공공조달에 참여하는 기업들은 청렴계약의 내용을 내부 준수 규범에 반영하고, 조달업무 담당자에 대해 청렴계약 교육을 시행하는 등 최소한의 노력들을 기울일 필요가 있고, 이러한 사전 노력을 통해 청렴계약 위반이라는 또 하나의 규제 위험을 피해 나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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