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이의 가치’인식이 핵심열쇠
자기 몫 내주는 자발성이 근간
기득권 고수하면 상생은 요원

우리가 사는 아파트는 고대 로마시대의 인슐라와 유사하다. 인슐라는 대체로 5층 이상의 공동주택으로 1층에는 상가가 있고, 2층부터는 주거공간으로 지어져 오늘날의 주상복합과 흡사하다. 2500년 전 이미 적층의 공동주택이 있었다는 사실이 놀랍다.

인간은 본래 가족이 아니면 한 지붕 아래 살지 않는 것이 본능이다. 그런데도 같은 주거공간에 여러 세대가 함께 머물게 된 것은 인구밀도 때문이다. 제한된 땅에 주거할 사람들이 많다보니 단독주거가 아닌 공동주거를 통해 함께 사는 주거 상생을 선택하게 된 것이다.

우리나라 역시 산업화가 시작되면서 도시로 몰려드는 사람들의 주거해결책으로 아파트 건설은 유효한 수단이었다. 하지만 아파트는 세월이 흐르면서 이웃과 지역공동체는 없고 그들만의 공간으로만 존재하는 단절의 문제를 낳기도 했다.

소위 성냥갑이라고도 불린 80년대의 판상형 아파트단지가 대표적이다. 네모반듯한 평면과 정남향으로 배치해 천편일률적인데다 지상공간은 사람의 공간이 아닌 주차장으로 배치해 소통하기 어려운 구조다. 심지어 담과 울타리로 경계를 두르거나 정문에 외부인 출입금지푯말을 붙여 놓고 외부로부터의 접근을 거부한다. 마치 안팎이 유리(遊離)된 갈라파고스 같은 모양새다.

요즘 짓는 아파트들은 단절이 아닌 외부와의 연결과 소통에 방점을 찍는다. 커뮤니티 시설이나 조경에 공을 들이는 것이다. 주차장은 지하화 되고 지상에는 연못과 산책로, 조각품과 나무와 꽃이 어우러져 있다.

담과 울타리 같은 경계를 없애 단지 내부와 외부를 연결한다. 아파트 입주자들이 공공을 위해 자기지분의 일부를 내어줌으로써 누구나 함께 즐길 수 있는 공간이 탄생한 것이다. 나의 공간에서 우리의 공간으로, 다시 누구나의 공간으로 진화하는 요즘 아파트단지의 모습은 이제 트렌드이자 설계의 기본으로 자리 잡고 있다.

아파트 입주자들이 자기지분의 일부를 흔쾌히 양보하는 것은 희생이 아닌 자발적 양보에 가깝다. 외부의 누군가가 강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발적 양보라도 내 것을 내놓는 입주자들의 행동을 순수한 미덕으로만 볼 수는 없다.

공간의 지분 일부를 외부에 내주어 공공성을 제공할 때 오히려 내 집의 가치가 높아진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집의 가치는 아파트의 평면구조나 배치뿐만 아니라 외부공간의 조성과 공공인프라의 연결성 등이 중요하다. 또 좋은 이웃이나 동네 분위기 같은 무형의 가치도 반영한다.

결국 입주자가 내놓은 지분의 일부는 공동체와 조화를 이루며 함께 사는 상생의 기반이 되고 집의 가치도 끌어올리니 손해 볼 일이 없는 양보인 셈이다.

요즘 상생에 대한 목소리가 유난히 많이 들린다. 세상이 복잡해지면서 이해관계자 혹은 집단 간의 대립과 갈등이 첨예하기 때문이다. 양극화가 심화되면서 시장의 분배 문제로 갈등이 큰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그런데 상생이 쉽지 않다. 통상 기득권을 가진 자가 자기 것을 내놓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상생은 아파트 입주민들이 자기 지분을 내놓는 것처럼 윈윈할 수 있는 가치에 대해 서로 인정하고, 필요성에 공감하며 자기의 몫을 스스로 내놓는 자발성을 우선으로 한다. 그러므로 상생은 나 또는 내가 속해 있는 집단이나 조직에서 먼저 시작돼야 갈등이나 분쟁이 없다.

칸막이와 기득권의 울타리는 누구에게나 있다. 살다보면 기득권 안에 머물며 외부에서 요구하는 상생의 목소리를 애써 외면할 때가 있다. 상생의 이름으로 내 것을 빼앗기는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때로는 칸막이 밖에서는 울타리를 허물면 파이를 키울 수 있다며 상생을 외치기도 한다. 칸막이 밖에 대해서는 상생을 요구하면서, 칸막이 안에서는 기득권을 공고히 쌓고 내 것은 한 치도 내놓지 않겠다면, 함께 잘 사는 상생이 설 곳은 없지 않을까?

돌고 도는 것이 세상이다. 자기가 하고 싶지 않은 일은 남에게 강요해서는 안되고, 다른 이로부터 대접받고 싶은 대로 남을 대할 일이다. 상생은 스스로의 경계를 먼저 허무는 것이다.

 

 

장경순
중소기업중앙회 상임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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