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작스러운 춘설에 봄이 발길을 돌렸나 싶더니, 제주에서는 때 이른 벚꽃이 꽃망울을 터뜨리며 다시금 봄을 알렸다. 춘분을 하루 앞둔 지난 20, 제주 서귀포에서 첫 개화 소식을 알린 벚꽃은 남부 지방부터 서서히 피어나고 있다.

서울의 벚꽃은 이번주를 시작으로 다음 달 초쯤이면 절정을 이룰 예정이다. 벚꽃 개화와 함께 희망찬 이야기도 들려왔다. 팬데믹이 시작된 2020년 이후 2년 연속 빗장을 걸어둔 여의도 벚꽃길과 석촌호수 벚꽃길이 3년만에 열린다는 것이다. 코로나19 이전의 떠들썩한 행사는 여전히 생략됐지만 서울 대표 벚꽃길을 그저 멀리서 바라보기만 했던 시민들에게는 반가운 소식이다.

연분홍 빛으로 거리를 화사하게 물들이는 벚꽃은 봄의 상징과도 같다. 향기는 거의 없지만, 꽃잎이 흩날리는 모습이 아름다워 꽃놀이 대상으로 특히 선호돼 왔다. 그래서 벚나무가 밀집한 지역인 석촌호수, 여의도, 대구 이월드, 진해 여좌천 등에서는 해마다 성대한 꽃축제가 열리곤 했다. 물론 이러한 축제가 아니어도 벚꽃은 어디서나 아름답다. 최근에는 코로나19로 거리두기 문화가 확산되고 인스타그램과 같은 SNS 사용자들을 중심으로 숨겨진 여행지를 찾는 문화가 번지며 그간 덜 알려져왔던 벚꽃 명소들이 새로이 주목받고 있는 모양새다.

 

아련한 봄날의 기억, 통영 봉수골

통영 봉수골 거리의 전혁림미술관은 ‘색채의 마술사’, ‘한국의 피카소’ 등으로 불리는 서양화가 전혁림 생가터에 마련한 미술관이다. 	※사진= 한국관광공사 제공
통영 봉수골 거리의 전혁림미술관은 ‘색채의 마술사’, ‘한국의 피카소’ 등으로 불리는 서양화가 전혁림 생가터에 마련한 미술관이다. ※사진= 한국관광공사 제공

통영은 봄에 더욱 아름답다. 봄 하늘을 품은 통영 바다는 짙은 쪽빛으로 빛난다. 쪽빛 바다에 연분홍 벚꽃색까지 더해지면 이만큼 설레는 비경이 또 있을까.

통영 케이블카와 루지를 타러 가는 길목에 자리한 봉수골은 봉평동 골목의 옛 이름이다. 불과 1km도 안되는 짧은 길이지만 4월이면 온 마을이 벚꽃으로 뒤덮이는 통영의 대표 벚꽃 명소다. 반나절 산책하며 둘러보기 좋은 마을 곳곳에는 옛 정취를 품은 간판들이 향수를 자극하고, 길 양옆으로 늘어선 벚꽃 나무가 아련함을 더한다. 벚꽃 뿐만이 아니다. 봉수골 골목 여기저기서 봄을 만나는 건 어렵지 않다. 용화사거리에서 미륵산 쪽으로 오르다 보면 전혁림미술관의 이국적인 외관이 보인다. 전혁림은 독특한 색채로 통영의 바다와 하늘을 그려, 통영의 피카소라 불리는 서양화가다. 화가의 생가 터에 조성된 미술관은 타일로 꾸민 외관 자체부터 하나의 작품이 된다.

전혁림미술관 바로 옆에는 자그마한 동네 서점인 봄날의 책방이 있다. 낡은 폐가를 수리해 책방과 게스트 하우스로 거듭났는데, 건축가 주인장의 섬세한 솜씨가 돋보인다. 1년에 한 번 봉수골 꽃편지라는 마을 신문을 만들어 이웃들의 소식과 통영의 문화를 공유하기도 한다. 다시 용화사거리를 기점으로 해안 쪽으로 내려가면 꽃의 시인 김춘수 유품전시관이 나온다. 생전 시인이 사랑하고 아끼던 물건들이 전시돼 있고, 시인의 친필로 만나는 시 구절은 파도처럼 마음을 적신다.

눈과 마음에 통영의 봄을 한껏 담았으면 이제 입으로도 맛 볼 차례다. 일년 중 딱 봄에만 맛볼 수 있는 도다리쑥국은 가히 환상적이다. 겨울 산란기 동안의 금어기를 마치자마자 푸른 통영 바다에서 갓 잡아 올린 싱싱한 도다리와 해풍 맞으며 언 땅을 뚫고 자란 초록빛 해쑥의 조화 그 자체만으로도 생명력 넘치는 봄이다.

 

산골짜기 꽃대궐, 거창 덕천서원과 용원정

마치 꽃대궐을 연상케 하는 거창 덕천서원은 어디에서 찍어도 인생샷을 얻을 수 있지만, 특히 이 다리가 대표적인 포토 스폿이다. 	※사진= 한국관광공사 제공
마치 꽃대궐을 연상케 하는 거창 덕천서원은 어디에서 찍어도 인생샷을 얻을 수 있지만, 특히 이 다리가 대표적인 포토 스폿이다. ※사진= 한국관광공사 제공

사방으로 지리산과 덕유산, 가야산 등의 높은 산을 병풍처럼 두르고 있는 경상남도 거창. 거창에서도 아주 골짜기에 위치한 덕천서원은 아는 사람만 아는 벚꽃 명소다. 봄이면 서원 고택 마당마다 목련이 하얀 수를 놓고, 목련꽃 하나 둘 고개를 숙일 때 쯤이면 비로소 벚꽃 잔치가 펼쳐진다. 서원 안 조그마한 호수는 벚나무에 둘러싸인 서원의 모습을 한 폭의 그림처럼 담아낸다. 그 위로 흩뿌려진 벚꽃잎을 보고 있자면 달아나는 계절을 부여잡고 싶을 정도로 눈부시다. 여기에 꽃잎들 틈에 보이는 작은 정자까지 운치를 더하면 그렇게 봄날의 풍경이 완성된다.

그야말로 꽃대궐을 연상케 하는 봄의 덕천서원은 어디에서나 인생사진을 건질 수 있다. 그 중에서도 찻길과 서원을 잇는 아치형 돌다리가 가장 유명하다. 아는 이들만 찾아왔다는 이곳이 조금씩 붐비기 시작한 것도 이 다리를 찍은 벚꽃 사진이 SNS를 통해 퍼져나가면서 부터다. 사람이 지나지 않는 오롯한 풍경을 담고 싶다면 조금 이른 시간에 찾아가는 것도 좋을 듯하다. 덕천서원에서 차로 20분 가량 떨어진 용원정 쌀다리 또한 거창의 숨겨진 벚꽃 명당으로, 아름다운 영화 속 한 장면을 떠오르게 한다. 한 사람이 겨우 지나갈 만큼 좁은 돌다리 위로 축 늘어진 꽃가지는 묘한 풍경을 자아낸다. 아직 사람이 붐빌 정도는 아니라 다리 곁에서 사람이 지나갈 때까지 잠시 기다리면 황홀경만 남은 찰나를 카메라에 담을 수 있다.

경상남도 거창에서도 아주 골짜기에 위치한 덕천서원은 오래된 고택과 다양한 꽃나무들이 조화를 이루는 숨은 벚꽃 명소다. 	※사진= 경상남도 제공
경상남도 거창에서도 아주 골짜기에 위치한 덕천서원은 오래된 고택과 다양한 꽃나무들이 조화를 이루는 숨은 벚꽃 명소다. ※사진= 경상남도 제공

거창 봄 풍경의 또 다른 매력은 다른 지역의 벚꽃이 다 질 무렵 만발하는 수양벚꽃길이 있다는 것이다. 월성계곡에서 병곡계곡으로 가는 길, 도로 옆으로 줄지어 선 수양 벚꽃 나무가 벚꽃 엔딩을 화려히 장식할 때쯤 봄은 더욱 짙어져 간다.

 

책과 커피 그리고 꽃, 종로 정독도서관과 카페아르크

도심 어디서든 팡파레를 울리는 벚꽃은 4월의 축복이다. 벚꽃을 보기 위해 멀리 떠날 여유가 없다면 주변을 둘러보자.

안국동에서 삼청동으로 이어지는 북촌 길목에 자리한 정독도서관은 봄이 되면 가장 예쁜 모습으로 단장한다. 1900년 화동 언덕에 개교한 경기고등학교가 1976년 강남으로 이전하면서 도서관이 된 곳으로, 50여만권의 장서와 25000여점의 비도서 자료를 소장하고 있다. 수만권의 책 만큼이나 나무도 많은데, 이 나무들을 그늘 삼아 조성된 야외 열람실이 독특하다. 햇살도 비켜가는 무성한 나무 아래 열람실은 눕거나 기대어 책을 보다가 잠깐 졸아도 좋을 만큼 포근하다. 야외 열람실 뿐만 아니라 마당 곳곳에 자리잡은 벤치 어디서나 독서가 가능하다.

특히 관내 벚꽃 명당으로 손꼽히는 등나무 아래 벤치는 봄을 정독하고 문장을 새기기에 더할나위 없다. 정원 한쪽엔 옛날엔 관아였다는 조선시대의 건축물이 고즈넉한 정취를 한껏 끌어올리고 작은 연못 주위로 퍼지는 물레방아 소리가 정겹다. 조선시대 겸재 정선이 인왕재색도를 그렸다는 석비 앞에 서면 금방이라도 그림 속으로 빨려 들어갈 듯 웅장한 산의 모습에 압도된다. 이러한 탓에 주말이면 독서하러 온 사람보다 꽃 구경, 산 구경하러 오는 사람이 더 많을 정도로 인파가 몰리기도 한다. 그러니 조금 더 여유롭게 이곳을 즐기고 싶다면 평일 방문을 권장한다.

정독도서관이 위치한 북촌에서 서촌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면 벚꽃 뷰로 유명한 카페 하나가 있다. 사직공원 옆 카페아르크. 루프탑에서 보이는 인왕산과 운경고택이 사시사철 다른 매력을 선사하는데, 그 중에서도 유독 봄에 문전성시를 이룬다. 한옥 기와 지붕 위로 만개한 벚꽃이 장관을 이루기 때문. 여기에 매일 아침 구운 고소한 빵과 그윽한 향의 커피는 봄날의 에너지를 충전시켜주기에 충분하다.

 

- 신다솜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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