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라인 플랫폼 공정화법 사실상 무산
정부, 민간 자율 규제로 방향 선회
범부처 협의체 주도로 정책지원 강조
소상공인·시민단체 “사실상 방임’ 성토
이용업체 과반이 각종 부당행위 경험
중기중앙회 “표준계약서·상생이 우선”

지난달 5일 디지털서비스법(DSA)과 디지털시장법(DMA)이 유럽의회를 통과했다. 디지털 시장법은 빅테크가 플랫폼 내에서 자사 서비스를 우선 노출하는 것을 금지한다.

법에 따르면 구글이 구글맵이나 지메일을, 아마존은 자체 제작 상품을 검색 결과 최상단에 노출할 수 없다. 또 스마트폰에 출고 당시부터 설치돼 있는 앱을 지울 수 있도록 허용해야 하고, 제3자가 개발한 다른 앱을 설치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아이폰에서 애플 앱스토어를 삭제하고 다른 앱 마켓을 설치할 수 있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또 텔레그램 메신저 사용자가 페이스북에 가입하지 않아도 페이스북 메신저에 메시지를 보낼 수 있도록 메신저 간 상호 운용성도 확보해야 한다. 함께 통과된 디지털 서비스법은 빅테크 기업들이 자사 플랫폼 내 종교적 편파 발언이나 테러, 성적 학대 등과 관련한 유해 콘텐츠를 자발적으로 삭제하도록 규정했다.

디지털 시장법을 어긴 테크기업에 대해서는 연간 글로벌 매출의 최대 10%, 디지털 서비스법을 어길 경우는 최대 6%에 이르는 막대한 과징금을 부과할 수 있다. 두 법안은 EU 국가별 승인을 받고 이후 6개월 뒤부터 시행될 예정으로, 업계에선 2023년 중순부터 빅테크들이 규제 영향을 받게 될 것으로 본다.

플랫폼별 차별화된 규율방안 마련

이번 규제는 빅테크를 직접 겨냥한 전 세계 최초 규제법안으로 주목을 받고 있다. 일본에서도 지난해 2월 온라인 플랫폼 규제를 법제화했다.

다만 EU와 차이점은 법령을 통해 규제를 명시하고 있더라도 민간의 자율적 준수를 기본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온라인 플랫폼 사업자는 정부가 정하는 지침을 토대로 자율적 절차와 체제를 정비하도록 하고 있다.

EU가 빅테크와 온라인 플랫폼을 대상으로 직접적인 규제에 나선 가운데, 국내에서는 그동안 국회와 공정거래위원회를 중심으로 추진돼왔던 ‘온라인 플랫폼 공정화에 관한 법률’(온플법) 제정이 사실상 무산됐다.

문재인 정부 당시 공정위는 온플법 제정을 추진했으나 별다른 진척을 보지 못했다. 플랫폼 규제 권한 등을 놓고 방통위·과기부가 이견을 보인 데다 플랫폼 사업자들도 반발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최근 윤석열 정부 들어서는 변화가 빠르고 다양한 참여자를 연계하는 플랫폼 시장의 특성상 정부 주도의 일률적 규제보다는 민간 자율 규제가 더 적합하다는 입장으로 선회했다.

구체적으로는 플랫폼 사업자·이용 소상공인·소비자 등이 참여하는 민간 자율기구에서 자율적으로 규제하되, 정부도 전기통신사업법과 공정거래법에 민간 자율기구 설립과 우수 기업에 대한 인센티브 제공 근거를 담아 자율규제 이행을 제도적으로 지원하기로 방안이다.

정부는 민간 자율기구를 갑을, 소비자, 데이터·인공지능(AI), ESG(환경·사회적 책무·기업지배구조 개선) 등 4개 분과로 나눠 운영하고, 각 플랫폼 특성에 맞는 차별화된 규율 방안을 마련한다는 계획이다.

정부는 지난달 6일 정부서울청사에서 ‘제1차 범부처 플랫폼 정책협의체’를 열어 혁신적이고 역동적인 플랫폼 생태계 구축 방안을 논의했다.

방기선 기획재정부 1차관은 “플랫폼 시장이 급성장하는 과정에서 플랫폼 기업의 불공정 행위 문제가 지속적으로 제기되고 있다”며 “규제와 혁신을 조화롭게 고려한 플랫폼 시장 규율체계 마련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범부처 플랫폼 정책협의체를 중심으로 범정부적 역량을 결집해 플랫폼 시장에서의 자율규제를 정책적으로 지원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정부는 “민간 주도의 자율규제 원칙에 따라 플랫폼 정책을 추진하되 법적 근거 마련, 자율규제 방안 제도화, 통합 플랫폼 실태조사 등을 통해 자율 규제가 차질 없이 이뤄지도록 뒷받침하겠다”고 강조했다.

구체적인 자율규제 방안은 플랫폼 사업자, 이용 소상공인, 소비자, 종사자 등 이해관계자가 참여하는 민간 자율기구에서 마련한다. 정부는 전기통신사업법을 개정해 자율기구의 법적 근거를 명시하고, 공정거래법에 자율규제 참여기업에 인센티브를 줄 근거를 마련하는 방안을 추진한다.

또 기존 자율규제 사례 등을 참고해 자율규약·상생협약과 자율분쟁조정 등 자율규제 방안을 마련하고 충분한 이행력이 확보될 수 있도록 지원한다. 부처별로 추진하던 플랫폼 실태조사를 일원화해 종합적·체계적으로 시장을 분석하고 부처 간 플랫폼 정의 규정을 통일하는 등 정책 인프라도 강화하기로 했다.

관계부처는 기재부가 주관하는 범부처 플랫폼 정책협의체를 중심으로 자율기구를 정책적으로 뒷받침하고 중장기 정책 방안을 논의할 계획이다. 지난달 27일에는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디지털 플랫폼 자율기구 법제도 태스크포스(TF)’를 발족시켰다.

과기정통부는 TF를 통해 디지털 플랫폼 자율기구의 법적 근거가 명시된 전기통신사업법 개정안 초안을 마련한 뒤 ‘범부처 플랫폼 정책협의체’ 등을 거쳐 연말까지 최종안을 마련할 계획이다.

TF에는 네이버·카카오·당근마켓·11번가·구글코리아 등 13개 주요 플랫폼 사업자의 실무 담당자와 김민호 성균관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등 법·행정 관련 학계 인사 6명이 참가했다. 간사인 김현수 정보통신정책연구원(KISDI)  플랫폼정책연구센터 연구위원등 전문가 3명도 포함됐다.

TF 발족은 정부가 지난 6일 개최한 제1차 범부처 플랫폼 정책협의체의 후속 조치다. 관계부처는 범부처 플랫폼 정책협의체를 중심으로 자율기구를 정책적으로 뒷받침하고 중장기 정책 방안을 논의할 계획이다.

산업진흥·공정거래법 등 ‘투트랙’ 필요

공정위는 이달 초 플랫폼 자율기구 내 갑을·소비자분과 첫 회의를 개최할 예정이다. 공정위는 갑을 분과와 소비자 분과의 주관부처로서 민간 주도의 자율규제안 마련을 지원할 계획이다. 오픈마켓, 배달, 숙소예약, 대리운전, 택시 등 업종별로 특성이 다른 만큼 각 플랫폼에 맞는 차별화된 규율을 모색할 전망이다.

갑을 분과에서는 플랫폼과 입점업체 사이에서 대두된 과도한 수수료·광고비 문제, 불투명한 상품 노출 기준, 플랫폼이 보유한 고객 데이터베이스(DB) 정보를 공유하지 않는 문제 등의 개선 방안이 논의될 것으로 보인다. 소비자 분과에서는 소비자 피해 예방과 구제를 위한 방안 등이 논의될 전망이다.

플랫폼 자율규제 논의가 본격화 되면서 소상공인과 시민단체는 반발하고 있다. 자율규제는 사실상 ‘방임’이라는 게 이들의 주장이다.

시민단체 ‘온라인플랫폼 공정화를 위한 전국네트워크(온플넷)’는 지난달 7일 서울 용산 대통령 집무실 앞에서 온플법 제정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단체행동을 벌이기도 했다. 온플넷은 지난 5월 녹색소비자연대, 소비자시민모임, 전국가맹점주협의회, 참여연대, 한국소비자연맹, 한국중소상인자영업자총연합회 등이 모여 결성했다.

이들은 “코로나19 이후 온라인 플랫폼 시장이 급성장, 시장지배적 지위를 이용한 각종 불공정 행위가 빈발하고 있다”며 “그러나 관련 법이 미비해 중소상인 및 자영업자, 플랫폼 노동자, 소비자는 대응이 어렵다”고 지적했다.

소상공인·중소기업계에서는 정부가 추진하는 자율규제방안에 대해 온라인 플랫폼에 의한 불공정거래 행위 발생 시 제재를 가할 법적 강제력이 없다고 우려하고 있다. 실제로 중소벤처기업부가 지난해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온라인 플랫폼 이용업체의 절반 이상(53.4%)이 각종 부당행위를 경험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와 같은 현실에 비춰 볼 때 시장지배적지위 남용이나 불공정거래 행위, 입점업체를 대상으로 한 갑질 등 현행 공정거래법 위반 사항은 엄격히 처벌해야한다는 게 이들의 입장이다.

소상공인업계 관계자는 또한 “온플법 제정이 사실상 무산된 만큼 기존 공정거래법에서 담고 있지 못하는 새로운 양태의 불공정행위에 대해서는 변화된 사회적 현실을 반영해 공정거래법을 개정, 사회적 약자인 입점업체와 소상공인들을 보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중기중앙회 관계자는 “정부에서 추진하고 있는 자율규제는 산업진흥법이라고 볼 수 있는 전기통신사업법 개정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서 “자율규제를 기반으로 한 산업진흥과, 공정거래법을 기반으로 한 불공정행위 방지라는 ‘투트랙’으로 방향을 잡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지적했다.

이 관계자는 또 “자율규제 도입 논의에 앞서 합의된 표준 계약서 마련, 규모별 중소기업 수수료 차등방안 및 수수료 상한 도입, 상생지원 확대 등의 사안이 우선 논의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어 “지난 3월 백화점협회, 온라인쇼핑협회와 공동으로 유통 상생협의체를 구성했다”면서 “유통 상생협의체를 자율규제 기구로 격상해 온라인플랫폼 등 중소유통분야 주요 현안에 대한 소통창구로 활용하는 것도 하나의 대안”이라고 제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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