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연 정육각 대표
김재연 정육각 대표

인플레이션이 죽어라 죽어라 한다. 미국 이야기인 줄만 알았다. 이젠 우리나라 이야기다. 이미 전 세계 이야기다. 지난 7월 발표된 미국 소비자물가지수(CPI)는 무려 9.1%를 기록했다. 1970년대 이른바 그레이트 인플레이션 이후 사상 최고치였다.

통계청이 지난 7월에 발표한 소비자물가 동향에 따르면 한국의 소비자물가지수는 전년 동월 대비 6.3%나 올랐다. 외환위기 당시인 199811월 이후 가장 높은 상승률이었다. 미국과 한국도 물가가 경제 위기 수준으로 높아진 셈이다.

특히 추석은 평범한 서민도 장바구니 물가를 온몸으로 체감하게 만들었다. 고기를 사도 과일을 사도 가격표에 0이 하나 더 붙어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농축산물 가격은 무려 7.1%를 기록했다. 소비자원 가격종합포탈 참가격에 따르면 삼겹살 가격만 해도 1.7%나 상승했다.

이번 추석은 물가 불안 때문에 고기도 과일도 배불리 못 먹는 한가위였던 셈이다. 추석 이후도 문제다. 이젠 공산품 가격이 차례차례 오를 판이다. 농심이 라면 가격을 11.3% 올리자 다른 라면 업체들도 평균 9.8%씩 값을 올릴 참이다. 과자값도 음료값도 들썩이고 있다.

 

한꺼번에 도축해 즉시 배송

이렇게 등골이 휘는 물가 상승세 속에 그나마 숨통을 틔어준 스타트업이 정육각이다. 정육각은 온라인 초신선 축산물 유통 플랫폼이다. 돼지고기를 도축하자마자 판매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고기도 산지 직송이 제일 맛있다. 고기 마니아들은 일부러라도 도축장까지 찾아가서 삼겹살을 사다 먹는다. 더 싸고 더 맛있기 때문이다.

정육각이 내세운 초신선의 뜻은 결국 산지직송이라 더 싸고 맛있다는 얘기다. 정육각은 2016년 온라인몰에서 판매를 시작한 이후 삼겹살만 830톤을 판매했다. 누적 회원수는 81만명이다.

추석을 앞두고 디지털과 모바일 기술을 앞세운 신선식품 유통 플랫폼들은 앞다퉈 할인 경쟁이 벌어졌다. 정육각이 앞장섰다. 정육각은 한우 선물세트를 최대 7%나 싸게 팔았다. 신선식품 유통 플랫폼으로는 가장 유명한 마켓컬리 역시 최대 10% 얼리버드 쿠폰을 지급했다. 오아시스 마켓도 최대 10%였다. 그나마 추석에 고기 한덩이 크게 먹을 수 있었던 건 이렇게 신선식품 유통 플랫폼들이 세일 경쟁을 벌인 덕분이었다. 물가에 기술을 걸었던 셈이다.

정육각의 핵심 기술은 D2C. 다이렉트 투 컨슈머다. 축산물 유통은 농장, 도축장, 육가공 공장, 도매시장, 세절공장, 소매점까지 6단계를 거친다. 하나도 컨슈머에게 다이렉트하지 않은 유통 구조다. 중간 유통과정을 거치면서 운송비와 유통마진 때문에 가격은 올라간다. 시간도 걸리기 때문에 냉장·냉동 보관을 거치면서 맛은 떨어진다.

축산물 유통전문플랫폼 정육각

6단계 유통구조 1단계로 단축

가격 낮추고 고기맛은 높이고

팔릴 만큼만 정육해 재고 제로


대기업 체인망 초록마을 인수

농산물 직거래앱 출시도 추진

정육각 이전엔 30조원 규모의 축산물 시장 전체가 너무 당연하다는 듯 이런 구조로 돌아갔다. 정육각은 6단계 유통 구조를 1단계로 줄였다. 정육각은 도매상이면서 소매상이다. 고기의 제조부터 유통과 배송까지 모든 걸 도맡는다. 판매는 정육각 온라인 자사몰과 모바일 앱을 통해 이뤄진다. 나이키가 도입해서 화제를 모은 D2C를 축산물 유통에 적용한 것이다.

정육각의 기술은 더 있다. 정육각은 자동발주 시스템을 개발했다. 쉽게 말해 그날 팔 고기를 그날 팔릴 만큼만 썰어놓는 기술이다. 재고가 남지 않도록 주문량과 재고량과 작업분을 일치시키는 것이다. 그러자면 고객의 수요 예측이 필수다.

정육각한텐 2016년부터 800톤이 넘는 삼겹살을 썰면서 쌓아온 빅데이터가 있다. 이걸 바탕으로 인공지능을 이용해서 수요 예측 알고리즘을 만들었다. 추석 시즌에 고기가 얼마나 팔릴지 정육각은 어느 정도는 알고 있다. 예측만 하는 게 아니다. 모객도 한다. 정육각은 도축하고 사흘 안에 고기를 배송해준다. 전국 각지의 삼겹살 수요를 모아서 한꺼번에 도축해서 즉시 배송해주는 방식이다.

물론 이게 가능하려면 한 가지 기술이 더 필요하다. 한꺼번에 많은 물량을 가공해서 배송할 수 있는 자동화된 스마트 팩토리다. 정육각은 김포와 성남에 스마트팩토리를 운영하고 있다.

 

수학적으로 고기 써는 스타트업

정육각은 고기를 수학적으로 썰어내는 스타트업이다. 그럴 수밖에 없다. 창업자인 김재연 대표는 카이스트에서 응용수학을 전공했다. 고기 요리사나 고기 유통 전문가 출신이 아니다. 단지 돼지고기 덕후였다. 카이스트 졸업을 앞둔 2016년에 우연히 돼지고기 도축장을 찾았다. 여느 고기 마니아들처럼 산지직송의 맛을 즐기고 싶어서였다.

도축장에서 무려 20킬로그램의 돼지고기를 사 왔다. 혼자는 다 먹을 수가 없어서 주변에 나눠줬다. 그런데 반응이 너무 좋았다. 이제까지 먹어본 돼지고기와는 차원이 다른 초신선한 맛이라는 반응들이었다. 일종의 시장 조사를 했던 셈이다.

당시 김재연 대표는 유학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더 큰 열정은 역시 창업에 있었다. 대학 시절엔 자연어 처리 프로그램을 개발한 적도 있었다. 잘 되진 않았다. 기술적 문제를 기술로 풀어보려는 시도였다. 시장은 좁고 해법은 난해했다.

반면에 고기 시장은 달랐다. 무려 30조 원 규모의 문제를 기술로 풀어낸다면 훨씬 맛깔난 일이 될 터였다. 김재연 대표는 친구들과 함께 도축장 근처 허름한 아파트에서 창업을 했다. 군대 동기가 상품 개발을 맡고 대학 후배가 개발을 담당하고 대기업에서 온라인 신사업을 담당했던 지인이 마케팅을 책임지는 구조였다. 처음엔 홈페이지도 없었다. 네이버 농축산물 직거래 카페를 통해 고기를 팔았다.

반응이 폭발적이었다. 유학 가기 전에 시간 때우기로 하기엔 너무 정확하고 너무 빠르게 프로덕트 마켓 핏을 찾아버린 셈이었다. 대부분의 스타트업들이 시장이 원하는 딱 맞는 제품을 찾아내기 위해 수년 이상을 소모한다. 끝내 프로덕트 마켓 핏을 찾지 못한 채 사라지는 스타트업도 많다.

모든 스타트업은 가설에서 출발한다. 어떤 제품을 시장이 원할 것이라는 가정법이다. 어긋나는 경우가 더 많다. 토스의 이승건 대표 역시 8번의 가설이 실패하고 9번째에 무료 송금 서비스라는 프로덕트 마켓 핏을 찾아냈었다. 그런데 정육각의 김재원 대표는 단박에 마켓 핏을 찾아냈다. 대단한 행운이었다.

 

·오프 통합플랫폼 도약

정육각은 지난 316일 초록마을을 인수했다. 초록마을은 대상그룹의 유기농 유통 계열사다. 정육각은 초록마을의 지분 99.57%900억원에 인수했다. 스타트업이 대기업 계열사를 인수한 셈이다.

지난 2월 세탁서비스 런드리고를 운영하는 의식주컴퍼니는 아워홈의 호텔 세탁공장인 크린누리 사업을 인수했다. 부동산 스타트업 직방도 삼성SDS의 홈IoT 부문을 인수했다.

스타트업과 대기업의 인수합병 거래는 속도와 투자 때문이다. 스타트업은 성장의 속도와 투자의 모멘텀이 필요하다. 반면에 대기업은 사업과 인력의 구조 조정이 필요하다. 정육각의 초록마을 인수 역시 다르지 않다.

정육각의 서비스 지역은 서울과 경기도에 집중돼 있다. 2000만명 가까운 인구가 밀집한 수도권에 집중하는 건 정육각뿐만 아니라 경쟁 신선식품 유통 플랫폼들의 공통점이다. 그렇다고 지역권을 포기해선 절대 안 된다. 유통 플랫폼 경쟁은 결국 속도전이기 때문이다.

일단 특정 제품 카테고리에서 1등을 차지해야만 한다. 단지 업계 1등이어선 안 된다. 소비자들도 해당 플랫폼을 1등으로 인식해야만 한다. 소비자들은 아주 작은 가격 차이와 품질 차이만으로도 쉽게 플랫폼을 갈아탄다. 로열티가 없다. 그나마 버티컬 시장에서 1등으로 각인돼야 소비자들의 습관적 선택을 받을 수 있다. 처음엔 가격 차이나 품질 차이에 예민하던 소비자들도 압도적 1등 플랫폼에는 충성도를 보이기 때문이다.

물론 1등도 1등을 유지하려면 더 많은 할인과 더 좋은 서비스를 지속적으로 제공해줘야 한다. 그래서 플랫폼 전쟁은 무한 출혈 경쟁으로 이어지곤 한다. 1등이 되는데도 출혈이 필요하다. 1등을 유지하는데도 출혈이 필요하다.

일단 1등이 되려면 관건은 속도다. 특정 제품군에서 경쟁자들이 쫓아오기 전에 아성을 구축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신선식품의 수산물 시장에선 인어교주해적단이 그랬고 축산물 시장에선 정육각이 그랬다. 둘 다 남보다 먼저 출발해서 남보다 빨리 확장했다.

제품군 다음에는 지역군이다. 서울과 경기 이외에 부산이나 광주 같은 대도시들을 경쟁자보다 누가 먼저 장악하느냐가 승부처다. 정육각이 초록마을을 인수한 이유다. 초록마을은 전국에 400개 오프라인 매장을 갖고 있다. 정육각 입장에선 전국 단위 유통망을 순식간에 확보할 수 있다. 게다가 각각의 매장들은 일종의 도심 물류 거점 역할을 할 수도 있다. 올리브영이 도심 점포를 매일 배송의 거점으로 삼았던 것처럼 말이다. 라스트 마일 서비스다.

정육각은 온라인에만 특화돼 성장해왔다. 소비자들은 신선식품을 직접 만져보고 확인하고 사려는 경향이 있다. 어머니들이 장을 보는 방식이다. 온라인은 편리하지만 신선식품 확장에는 한계가 있다. 초록마을 인수를 통해 온·오프라인 통합 플랫폼으로 도약할 수 있다. 바로 이것 때문에 초록마을 인수전에는 정육각 이외에도 마켓컬리와 이마트에브리데이가 달려 들었었다.

정작 인수전은 처음부터 정육각이 유리했다. 마켓컬리나 이마트에 비해 지명도는 떨어졌지만 초록마을의 현황과 발전 전략을 정확하게 마련해왔기 때문이다. 대상그룹측도 처음부터 정육각을 유력한 인수 후보로 꼽았다. 고기는 역시 야채로 싸먹어야 제맛이다.

정육각은 초록마을 인수로 시리즈D 추가 투자의 모멘텀도 마련했다. 정육각 시리즈C 투자에 참여했던 스톤브릿지벤처스 등의 투자자들이 초록마을 인수자금도 수혈했기 때문이다. 당연히 시리즈D 투자에도 참여할 공산이 크다. 정육각은 조만간 농산물 직거래앱 직샵도 선보일 예정이다. 고기판매 기술인 D2C를 다른 농산물에도 적용한 서비스다. 네이버가 전략적 투자자로서 100억원을 투자했다.

신선식품 유통 경쟁은 치킨 게임에 가까운 출혈 경쟁이다. 소비자들에게 더 싼값에 더 빨리 상품을 공급하려면 적자가 불가피하다. 첫 구매 100원 마케팅은 두말할 것도 없는 출혈 경쟁이다. 이걸 견디면서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지배적 사업자가 돼야 승리할 수 있다. 그때까지 투자를 계속 받을 수 있느냐가 관건이다.

최근 170억원 이상의 투자를 이끌어냈던 수산물 유통 플랫폼이 사실상 접었다. 추가 자금 조달에 실패하면서 런웨이가 끝났기 때문이다. 인플레이션과 고금리 시대로 접어들면서 스타트업 투자에도 겨울이 왔다. 가입자가 늘어나고 거래가 늘어나고 추가 투자가 이뤄지는 선순환 고리가 끊긴 탓이다. 계획된 적자는 계획된 투자가 있어야만 지속가능하다. 정육각의 고기 전쟁은 이제부터다.

 

- : 신기주 더 밀크 코리아 부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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