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니스에서 경쟁자를 없애는 가장 빠른 방법이 있다. 절대 거절 할 수 없는 제안을 하는 것이다. 돈이다. 사실 경쟁자를 없애려면 죽이거나 이겨야만 한다. 죽이는 건 치킨 게임이다. 韓日 반도체 전쟁이 대표적이다. 상대방이 죽을 때까지 경쟁하는 것이다. 당연히 우리 쪽도 출혈이 크다.

죽이지는 않지만 레이스에서 이기는 방법도 있다. 상대보다 더 스마트하고 상대보다 더 빠르면 된다. 이기는 건 정정당당하다. 문제는 영원한 승자는 없다는 사실이다. 언젠가 상대가 더 잘 하는 날이 오면 얼마든지 역전당할 수 있다. 그래서 비즈니스에서 경쟁자를 없애는 최상책은 따로 있다. 경쟁자를 돈으로 사버리는 것이다.

 

어도비 아성 무너뜨린 피그마

지난 915일 어도비가 피그마를 200억 달러에 인수했다. 이게 경쟁자를 돈으로 사버린 경우다. 200억 달러면 한화로 287000억원 정도다. 피그마의 1년 수익의 50배에 달한다. 어도비는 1년 매출의 50배에 달하는 돈을 주고 피그마를 인수한 것이다.

어도비는 대표적인 산업용 상업용 소프트웨어 업체다. 사진 편집 프로그램인 포토샵과 동영상 편집 프로그램인 프리미어와 문서용 편집 프로그램인 아크로밧이 대표 상품이다. 어도비는 1982년에 창업했다. 피그마는 2011년에 샌프란시스코에서 설립된 스타트업이다. 주 종목은 디자인 소프트웨어다.

피그마의 디자인 소프트웨어는 클라우드 기반이다. 어도비는 무거운 프로그램을 다운 받아서 윈도우 위에 설치해야만 작동한다. 무겁다. 반면 피그마는 크롬 같은 인터넷 브라우저를 통해 접속만 하면 구동된다. 가볍다.

무엇보다 피그마는 협업에 최적화돼 있다. 어도비의 디자인 프로그램들로 협업을 하려면 생성된 파일을 주거니 받거니 해야만 한다. 수많은 버전이 만들어진다. 반면에 피그마는 웹을 통해 작동되기 때문에 실시간으로 상호 수정 작업이 가능해진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원격근무가 확산되면서 피그마는 어도비 시장을 빠르게 잠식해들어가기 시작했다.

어도비는 팬데믹 기간 동안 전문가용 디자인 소프트웨어 시장의 지배력을 상실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어도비 매출의 60%가 나오는 시장이다. 회사의 기둥 뿌리가 송두리째 흔들리고 있다는 얘기다. 원인은 피그마다.

구글 독스가 워드 프로세서를 바꿨고 깃허브가 코딩을 바꿨듯이 피그마는 디자인을 바꿀 것이다.” 실리콘밸리에선 이런 말이 있을 정도다. MS워드의 지배력을 구글 독스가 깼다. 인공지능 기반의 자동완성 코딩 프로그램 깃허브는 코딩의 표준을 바꿨다.

그리고 피그마는 어도비의 아성을 무너뜨렸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도 대선 캠프에서 피그마를 사용했다. 마이크로소프트와 넷플릭스와 줌과 에어비앤비와 우버와 BMW가 피그마의 고객사다.

피그마 1년 수익의 50배 들여 빅딜

시장지배력 강화외연확대는 미미


인수발표 이후 어도비 주가 17% 폭락

인력·문화 화학적 합병 넘어야 할 산


규제당국 반독점 판단주요 고비

새 도전자 캔바와 치킨게임도 예고

어도비의 피그마 인수는 어도비 역사상 최대 규모의 빅딜이다. 어도비는 2018년 마케팅 자동화 솔루션 스타트업 마케토를 475000만 달러에 인수한 적이 있다. 그 뒤에도 크고 작은 인수합병을 진행했지만 이렇게 작은 스타트업을 이렇게 큰 돈을 들여서 인수한 건 처음이다.

사실 SaaS 시장에선 어도비의 피그마 인수처럼 큰 돈을 들여서라도 실질적 경쟁자를 제거하는 인수합병이 자주 벌어진다. 2020년 세일즈포스의 슬랙 테크놀로지 인수가 대표적이다. 세일즈포스는 무려 280억 달러를 들여서 비즈니스 협업툴인 슬랙을 서비스하는 스타트업 슬랙 테크놀로지를 전격 인수했다.

대기업 입장에선 신생 스타트업의 기술을 흡수하고 잠재적 경쟁자를 제거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스타트업 입장에선 IPO로 가는 험난한 과정 대신 단판 빅딜을 통해 투자자들한테 큰 수익을 돌려줄 수 있다. 또 사업전략적으로도 큰 브랜드의 제품군에 흡수됨으로서 소모적인 마케팅 전쟁을 피하고 안정적인 성장을 추구할 수 있다. 어도비와 피그마 빅딜이 여기에 해당된다.

 

스타트업 겨울무리한 인수 의구심

정작 주식시장은 이런 저런 전략적 득실에도 불구하고 일단 우려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피그마 인수가 발표된 직후 어도비 주가는 하루만에 무려 16.79%나 폭락했다. 솔직히 200억 달러 규모의 인수합병을 어도비 투자자들이 지지해주긴 쉽지 않다. 단적으로 회사의 보유현금이 줄어들면 주식배당도 줄일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2022년은 스타트업의 겨울이다. 스타트업에 유입되는 신규 자금이 현저하게 줄어든 상태다. 그런데 어도비가 무려 30조원에 스타트업 하나를 인수한 것이다. 전략적 이유가 있다고 해도 인수가격이 너무 높은 게 아니냐는 의심이 들 수밖에 없다.

사실 어도비와 피그마의 빅딜을 통해 진짜 대박이 난 건 따로 있다. 2011년 피그마 창업 초창기부터 투자를 했던 벤처캐피털은 인덱스 벤처스다. 인덱스 벤처스는 피그마의 지분 12%를 갖고 있다. 이밖에도 링크드인의 창업자인 리드 호프만이 설립한 벤처캐피털 그레이록 파트너스와 실리콘밸리의 유명 벤처캐피털인 세콰이어 캐피털도 피그마의 주주다. 이번 빅딜로 웃는 사람들이다.

물론 정말 웃음꽃이 핀 사람은 피그마의 공동창업자 딜런 필드다. 딜런 필드는 여전히 피그마의 지분 10%를 갖고 있다. 필드는 올해 30세다. 2009년 브라운대학 컴퓨터공학과에 입학했지만 창업을 위해 중퇴했다. 페이팔 창업자 피터 틸이 설립한 창업 지원 프로그램이 발탁됐는데 10만 달러를 투자받는 대신 학교를 떠나 사업에 올인하는게 조건이었기 때문이다.

필드도 처음부터 성공한 건 아니었다. 처음엔 도로 교통을 감시하는 드론 소프트웨어나 인터넷에서 밈을 자동으로 생성하는 프로그램 같은 허접한 아이디어에 매몰됐다. 그러다 디자인 소프트웨어로 갈 길을 딱 정한다. 피그마를 창업한다. 그때가 20세 때였다.

디자인 소프트웨어는 다 비싸고 어렵고 무겁다는 문제를 해결하는 게 목표였다. 딜런 필드는 피그마에서 싸고 쉬운 디자인 SaaS를 만들어서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비전을 갖고 있었다. 무엇보다 필드는 개발자면서도 디자인을 이해하는 예술과 공학의 교차로에 서 있는 인물이었다.

인덱스 벤처스의 대니 라이머 대표도 필드의 이런 재능을 알아보고 필드가 19세이던 때부터 투자를 시작했다. 처음 만났을 때 라이머는 필드가 미성년자인줄 모르고 술을 권했다 무안해한 적도 있었다.

피그마도 처음부터 대박이 난 건 아니었다. 창업하고 4년이 지나도 베타 버전조차 나오지 않아서 투자자들의 애를 태웠다. 2016년에 본제품이 출시됐지만 진짜 기회는 코로나 팬데믹이었다. 재택근무가 늘어나면서 피그마의 수요도 폭증했다. 201811500만 달러로 평가 받았던 피그마의 기업 가치는 2021년엔 100억 달러까지 올라갔다. 결국 어도비는 시장가의 2배인 200억 달러에 피그마를 인수했다.

 

어도비 주가, 연초보다 반토막

어도비는 피그마 인수에 성공했지만 승자의 저주에 노출된 상태다. 피그마를 인수해서 경쟁자를 제거하고 시장 지배력을 유지강화하는데는 성공했다. 정작 그 비싼 돈을 주고 피그마를 사도 어도비의 제품 포트폴리오가 늘어나는 건 아니다. 어도비에도 피그마의 비슷한 어도비XD프로그램이 있다. 시장 외연이 넓어지지 않으니 당장 매출이나 순익이 드라마틱하게 증가하기도 어렵다.

당장 주가 하락도 고민이다. 어도비 주가는 연초 대비 절반 가까이 반토막이 난 상태다. 연초부터 시작된 기술주 하락세를 고려해도 어도비의 낙폭은 과도하다. 어도비의 20223분기 실적은 나쁘진 않았다. 매출도 전년 동기 대비 13% 증가했다.

그런데도 시장은 어도비의 미래를 밝게 보지 않는다. 어도비의 피그마 인수는 시장의 우려를 오히려 증폭시킨 꼴이 됐다. 피그마를 인수해야할만큼 어도비의 상업용 디자인 프로그램 시장의 지배력이 약화됐다는걸 자인한 셈이기 때문이다.

미국 규제 당국의 반독점 판단도 중요한 고비다. 리나 칸을 수장으로 하는 연방거래위원회는 최근 대기업의 경쟁 저해를 막고 불공정 경쟁을 방지하는 내용의 행정 명령에도 서명했다. 특히 실리콘밸리 빅테크가 관리 대상들이다. 지금은 빅테크가 스타트업을 인수해서 시장 지배력을 강화하기에 적당한 때가 아니라는 의미다.

연방거래위원회는 어도비와 피그마의 경쟁 저해 가능성도 면밀하게 들여다보겠다는 입장이다. 그리고 모든 인수합병에 뒤따르는 화학적 결합의 문제가 남는다. 물리적으로 회사 조직을 합치는건 쉽다. 회사의 인력과 문화가 하나로 녹아들어서 시너지 효과를 만드는 화학적 결합은 섬세한 작업이다. 잘못하면 내전으로 격화된 AOL과 타임워너의 합병 꼴이 날 수도 있다. 인수된 픽사가 인수한 디즈니의 애니메이션 역량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 시켰던 픽사와 디즈니 인수처럼 성공 사례도 있다.

어도비의 피그마 인수는 급부상하는 경쟁자를 공격적 인수합병을 통해 먹어버린 경우다. 그렇지만 곧 새로운 경쟁자가 나타나기 마련이다. 유력한 도전자는 캔바다. 호주 스타트업인 캔바는 인스타그램용 이미지를 쉽게 디자인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비전문가용 디자인 프로그램이다. 2021년 한때는 무려 400억 달러의 기업 가치를 인정 받았다. 물론 이지머니의 시대였으니까 가능한 얘기였지만 말이다.

포춘 500대 기업 가운데 85%가 캔바를 쓴다는 통계도 있다. 캔바는 2007년 당시 19세였던 멜라니 퍼킨스가 창업했다. 캔바는 프랑스어로 캔버스를 뜻한다. 피그마를 먹어도 어도비한텐 캔바라는 경쟁자가 또 있다는 얘기다.

경쟁자를 없애는 가장 빠른 방법은 돈을 주고 사버리는 것이다. 그렇지만 인수합병 과정에서 진정한 경쟁력을 확보하지 못하면 결국 또 다시 새로운 경쟁자를 만나게 된다. 그렇다고 또 사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경쟁은 끝이 없다.

- 신기주 더 밀크 코리아 부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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