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우_서울과학기술대학교 안전공학과 교수
정진우_서울과학기술대학교 안전공학과 교수

중대재해처벌법이 시행된 지 9개월 남짓 지났다. 지난해와 비교해 법 적용 대상 기업에서 중대재해가 줄기는커녕 오히려 늘어났다. 지난 정부 때 행정인력과 예산이 대폭 증가한 것을 고려하면 이 법이 중대재해 예방에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라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는 방증이라고 할 수 있다. 과학과 이성보다 이념과 감성을 앞세운 법 정책의 초라한 실적이다.

지난 정부는 사망사고를 절반으로 줄인다는 명분으로 인력과 예산을 비대할 정도로 늘리고도 목표에 턱없이 부족한 성과를 거둔 것에 대한 책임과 비난을 피하기 위해, 낮은 처벌수준을 탓하며 급기야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중대재해처벌법을 제정하고 말았다. 예방시스템 개선 없이 여론의 환심을 사기 위한 보여주기 정책의 끝판왕이라고 불릴 만하다.

이 법의 제정 배경이 이렇다 보니 법의 부작용이 이곳저곳에서 속출하는 건 이미 예견된 일이다. 기업들의 재해예방역량은 향상되지 않고 서류작업과 형식주의에 매몰되면서, 이 법은 재해예방에 전문성이 없는 대형로펌과 컨설팅기관의 땅 짚고 헤엄치기 식의 돈벌이 대상으로 전락했다.

국제적으로 보면 중대재해는 법 정책이 바뀌지 않더라도 줄어드는 경향에 있다. 자동화, 기술발전, 서비스산업화 등으로 중대재해는 매년 줄어드는 것이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올해 중대재해가 감소되지 않고 있다는 건 예방시스템이 고장났다는 얘기다. 이 법에 대비해 기업과 사회가 들인 비용을 감안하면 중대재해행정의 가성비는 형편없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낭비도 이런 낭비가 없다.

법 시행후 재해발생 되레 증가

기업 안전관리 점점더 형식화

신속 폐지·대폭 개정 불가피

아이러니 한 것은 법 제정에 혈안이었던 자들의 숙원이었던 처벌조차 기능부전에 빠졌다는 점이다. 지금껏 단 두건만 기소되는 굴욕적인 실적을 거두고 있다. 이 법을 집행하고 있는 많은 인력이 사실상 헛발질만 하고 있는 셈이다. 법에 위헌소지가 많은데다 내용 자체가 엉성한 것의 당연한 결과이기도 하다. 형식적으로라도 서류를 작성한 기업은 처벌을 피해 가고 있다.

이런 가운데 수사기관은 자신들의 존재감을 보이기 위해 수사를 핑계로 서류를 무분별하게 요구하고 있다. 중대재해 발생 기업에서는 수사기관의 막무가내식 요구에 대응하느라 예방활동이 사실상 마비될 지경이라고 한다. 어떻게든 법위반을 찾아내려는 수사기관의 과욕이 권한남용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수사 적폐의 전형이다.

심각한 문제는 단기적으로 중대재해 감소 효과가 없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중장기적으로 기업들의 안전관리가 더 형식화돼 가고 있다는 점이다. 법의 의무주체와 내용 자체가 모호하고 다른 법과 충돌되다 보니, 누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어 많은 기업들을 형식적 대응 방향으로 내몰고 있다.

정부는 이 법에서 강조하는 안전보건관리체계의 기본적인 준수여건도 마련하지 않은 상태에서 중대재해가 발생하면 경영책임자를 엄벌에 처하겠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기업들의 안전에 대한 관심이 온통 발등에 떨어진 경영책임자 처벌을 피하는 데 맞춰지고 있다. 체계적으로 안전역량을 조금씩 강화하는 자율안전은 한가한 일이 돼 버렸다.

안전관계법의 목적은 재해예방의 실효성을 확보하는 것에 두어야 한다. 이를 위해선 무엇보다도 법의 내용이 합리적이고 보편적이어야 한다. 예측 가능성과 이행 가능성을 갖추지 못하면 처벌수준을 높이더라도 기업들의 법 준수 의지를 이끌어내지 못하고 처벌받는 자들조차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 특히 재해예방 투자여력이 부족한 기업은 아예 자포자기를 할 가능성이 높다. 정부 자신들도 지키지 않고 있는 것을 기업에게 준수하라고 하는 건 불공정한 처사이기도 하다.

이런 상태에서 20241월에 50인 미만 기업에까지 이 법이 적용된다면 지금보다 훨씬 더 큰 혼란이 야기될 것은 불을 보듯 훤하다. 여야 정치권은 진정성과 결자해지(結者解之)의 정신으로 조속히 이 법을 폐지하거나 대폭 개정해야 한다. 눈앞의 표를 의식해 법을 이대로 놔두는 것은 취약한 자의 보호에 역행하는 처사일 뿐만 아니라 사회적 혼란과 낭비를 방치하는 악행임을 명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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