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액대금 안 갚고 법인 뒤에 숨은 사장…범죄감식 등 강한 압박하자 ‘백기투항’

산업통상자원부가 지난달 1일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경기가 불확실한 상황 속에서도 미국에 대한 수출은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대미 수출품목 리스트를 보면 1위 자동차에 이어 반도체, 무선통신기기, 섬유, 그리고 가전제품이 Top 5에 들어있다. 필자는 이중 중소기업과 연관성이 많은 섬유(의류)수출과 관련된 최근의 소송 건을 소개한다.

 

한국 의류 생산업체의 미국 수입상을 상대로 한 채무 청구 소송 건

배경설명 : A사는 뉴욕 소재 B사에 지난 수년간 별 문제 없이 스포츠 의류를 공급해왔다. B사의 디자인 요청에 따라 의류를 제작, 수출하며 가끔 AK사장은 미국으로 출장을 와 BL사장과 좋은 관계를 유지해 오던 터였다. 그런 연유로 B사가 수 차례 인보이스 처리에 늑장을 부렸어도 별 다른 경계심을 갖지 않았다. 이런 일이 몇 번 반복되며 미수금은 쌓여갔고 그가 잠깐 한눈 판 사이에 B사의 채무는 3백만 달러에 이르게 됐다. L사장은 전화도 받지 않았고 급히 뉴욕으로 날아온 K사장을 만나주지도 않았다. 이 딱한 상황을 바라보던 B사의 매니저가 넌지시 꺼낸 말은 L사장이 도박에 빠져 자리를 지키지도 않거니와 카지노에서 증발된 돈을 받기는 힘들 것이라는 조언이었다.

- 소송 결정 : 일단 대금지급 요구서한을 보냈으나 예상대로 B사는 대응하지 않았다. 소송비용의 부담을 끌어안고 승소판결을 이끌어내도 피고가 변제 능력이 없으면 배상판결문은 휴지 조각이 될 수도 있다는 조언에도 A사는 과감히 소송 결정을 내렸다.


- 법인 피고 vs 개인 피고의 차이점 : 주식회사는 법인을 개인으로부터 분리시켜 사업 중 발생할 수 있는 채무, 소송, 파산신청 등의 책임을 회사로 한정시켜 개인 주주로부터 책임을 차단시키는 데 설립목적이 있다. 그러나 법인이 지켜야 할 제반 절차나 형식을 무시하면 주주는 이명동일인(Alter Ego)’으로 간주돼 책임을 떠맡게 된다. 이런 경우 법인의 유한책임 보호막이 뚫리게 되며 회사의 채무는 개인에게도 적용된다.

패션의 도시 뉴욕은 의류 수입업체들이 밀집해 있는 곳이다. 일부 악덕업자들이 해외 수출업자들을 표적으로 연출된 신뢰를 쌓아가며 몇 년간 거래를 하다 어느 순간 수입대금을 치르지 않은 물건을 팔아 버리고 수백, 수천만달러의 돈을 삼킨 후 법인을 폐쇄하는 정황이 노출된 적이 몇 번 있다. 이러한 사기행위 처벌에 관한 뉴욕주 현행법의 맹점을 이용해 거래구조 상 약자의 위치에 있는 외국회사들은 결국 무고한 희생양이 되고 만다. 어쨌든 무역 소송은 법인 사이에 발생한 채권·채무 관련 사건이기 때문에 일단은 법인을 피고로 시작될 수밖에 없다.


- 법인의 채무를 개인 채무로 : 법인의 보호막 뒤에 숨어있는 개인을 잡으려면 소송을 시작한 후, 증거서류 상호 공개 교환 과정을 통해 넘겨받은 피고의 은행 명세서, 크레딧 카드 사용명세서, 세금보고서 등을 세밀히 분석하는 일이 우선이다. 거래 내역이 복잡할 경우에는 범죄감식 회계사를 동원하기도 한다. 거래 내역을 하나하나 살펴가며 법인의 돈이 개인적으로 유용됐거나 변칙사용된 수상쩍은 거래를 잡아내는 일을 맡긴다. 처음에 2개의 법인을 피고로 시작한 소송은 Discovery 과정에서 속속 드러난 주주들의 변칙행위를 근거로 법원의 허락 아래 피고 법인들의 보호막을 뚫고 세 차례나 소장을 보충, 변경해가며 피고를 6명으로 늘릴 수 있었다. L사장 개인은 물론, 그의 부인, 나중엔 그의 자녀와 개인 회계사까지도 증인심문(Deposition)에 불러내 피고로 추가했고, 이들의 개인재산을 심각하게 위협할 수 있는 법적 토대를 구축하기에 이르렀다. 결과는 이들의 항복을 받아들여 성공적인 협상으로 끝을 맺을 수 있었다.


- 소송후기 : 필자는 소송 과정에서 K사장으로부터 들은 L사장의 취향과 성향, 예상되는 비즈니스 동선, 친구·가족관계 등에 대한 정보와 B사의 직원이 말한 L씨의 카지노 동정에 주목했다. 나중에 카지노들로부터 세밀한 도박자료도 뽑아냈고 손님의 동의를 얻어 사설탐정을 고용, 정보를 수집하기도 했다.

이러한 법률 외적인 요인들이 이번 소송의 향방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고 궁극적으로 만족할 만한 결과를 도출해내는 데 큰 역할을 했음은 두말할 여지가 없다. 필자의 소송 전략도 중요했지만 K사장은 한 순간의 태만에도 불구하고 평상시 거래처의 사업 동향과 재정 상태를 민감히 관찰해 왔으며, 어느 순간 과감히 링에 뛰어들어 한판승부를 마다하지 않는 승부 근성을 보여줬다. 클라이언트에게 공을 돌리고 싶다. 그가 다시 뉴욕을 사랑할 수 있게 돼 은근히 기분이 좋았다.

 

정홍균 변호사는 미국 뉴욕에서 지난 25년간 한국 기업의 미국 진출과 관련된 다양한 형사·민사소송을 수행해왔다. 정 변호사는 뉴욕 브루클린 검찰청 검사, 뉴욕 총영사관·KOTRA 자문변호사를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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