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도 디어만큼 달릴 수 없다.” 존 디어의 유명한 광고 문구다. 존 디어는 지난 1837년 설립된 미국의 농기계 제조사다. 그런데도 CES 2023의 주인공이 됐다. CES는 글로벌 테크놀로지 트렌드가 총집결하는 컨퍼런스다. 202315일부터 8일까지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다.

CES는 원래는 TV나 냉장고 같은 가전 제품을 소개하는 전시회였다. 이젠 인공지능, 자율주행, 드론, 스페이스테크, NFT까지 미래 기술을 총망라하는 주요 행사가 됐다. CES 2022만 해도 무려 300개 자동차 메이커들이 참가한 사실상의 글로벌 최대 모터쇼였다. CES에서 키노트 발표자는 주인공격이다. 컨퍼런스 맨 앞에서 신기술과 신제품을 소개하면서 미래 기술 트렌드의 방향을 제시한다.

CES 2023의 키노트 발표는 존 디어가 맡는다. 19세기에 창업한 농기계 제조사가 21세기를 선도하는 테크놀로지 행사를 주도하게 된 것이다. 누구도 디어보다 앞서 달릴 순 없다.

 

진흙토양 맞춤형 쟁기 개발

지금 북반구는 극강의 한파를 경험하고 있다. 기상이변 탓에 북극의 찬 공기가 이례적으로 남하했다. 덕분에 서울도 뉴욕도 얼음 도시가 됐다. 이런 이상기후는 결국 글로벌 식량생산에 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 식량농업기구에 따르면 2022년 글로벌 곡물 생산량은 2021년에 비해 1.8% 넘게 감소할 것으로 전망된다.

자연재해뿐만이 아니다. 인재도 식량생산량에 영향을 준다. 2022년 초 발발한 우크라이나 전쟁은 전세계 밀 생산량에 직접적인 타격을 입혔다. 원래가 우크라이나는 밀 곡창지대다. 국토의 70%가 농경지다. 우크라이나 국기의 푸른색과 노란색은 하늘과 밀밭을 상징한다. 우크라이나는 2020년에만 2400만 톤의 밀을 수확했다. 1800만 톤을 수출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밀밭이 전쟁터가 됐다. 식량위기가 도미노처럼 전세계를 휩쓸기 시작했다. 인도는 자국의 밀수출을 금지했다. 튀르키에와 이집트에선 정정이 불안해질 정도였다. 여파는 거대 밀 생산국인 미국과 중국에까지 미쳤다. 먹거리가 하늘이다.

그런데 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한 직후 러시아가 노린 목표 가운데 하나가 존 디어였다. 러시아군은 우크라이나의 곡창지대 중심도시인 멜리토폴에서 사슴 사냥 작전을 시행해다. 멜리토폴 시내 존 디어 대리점을 습격해서 존 디어 트렉터들을 노획하는 도둑질 작전이었다. 우크라이나의 농업 기반 인프라를 붕괴시켜는 의도였다.

24시간 쉼없는 쟁기질, 생산성 쑥

스마트폰 관리, 농부도 재택근무


트랙터계 페라리, 구독경제 도입

세계 농업·농기계산업 판도 빅뱅


인공지능 트랙터시장 급속팽창

독보적 초격차로 백년기업 질주

동시에 약탈한 존 디어 트렉터들을 가져다가 러시아 밀 농사에 사용하려는 시도였다. 실패했다. 존 디어에 달린 자율주행 기능 탓에 트렉터를 기동시킬 수가 없었던 탓이었다. 이 사실이 밝혀진 것도 존 디어 트렉터에 달린 GPS 추적기 덕분이었다.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존 디어 트렉터 쟁탈전이 식량쟁탈전과 같은 의미가 됐다는 뜻이었다. 기술을 확보하는 쪽만이 기후위기와 전쟁위기가 유발한 식량위기에서 안전할 수 있다는 의미다. 존 디어가 농업기술의 키워드다.

존 디어는 CES 2022에서 이미 자율주행 트렉터 모델8R을 선보였다. 이름하여 로봇 트렉터다. 존 디어의 로봇 트렉터는 농부가 잠자는 밤 시간에도 밭을 갈고 씨를 뿌리고 농약을 살포한다. 24시간 내내 일하는 트렉터가 있다면 당연히 농업생산성이 증가할 수밖에 없다. 심지어 농부도 재택근무가 가능해진다. 농부는 스마트폰으로 트렉터의 상태를 주기적으로 체크만 해주면 된다.

농업의 KPI는 수천년 동안 한 번도 바뀐 적이 없다. 단위 시간당 투입되는 노동량 대비 생산량이다. 200년 전 존 디어가 등장한 것도 노동량 대비 생산량을 늘려주는 쟁기 덕분이었다. 대부분 영국과 아일랜드 출신 이민자였던 미국 농부들한테 끈적한 진흙 토질 흙은 골칫덩어리였다. 영국은 모래흙이었다. 자꾸 흙을 털어줘야하는 영국식 쟁기는 미국 농토에는 맞지 않았다. 존 디어는 끝을 둥글게 만든 둥근 쟁기를 개발했다. 미국의 농업생산성은 존 디어 쟁기 덕분에 비약적으로 증가했다.

 

빅테크 뺨치는 R&D 투자

둥근 쟁기와 로봇 트렉터는 200년의 시간차가 있지만 기본 원리는 같다. 노동량은 줄이고 생산량을 늘리는 것이다. 존 디어 로봇 트렉터엔 6쌍의 스테레오 카메라가 창작돼 있다. 인간의 눈처럼 사물을 촬영한다. 엔비디아가 개발한 GPU프로세서가 카메라가 찍은 이미지를 분석해서 인식한다. 로봇 트렉터의 인공지능은 길만 찾아다니는 게 아니다. 밭에 난 풀이 잡초인지 벼인지 알아서 구분해준다. 논과 들의 무수한 이미지 데이터를 딥러닝한 결과다.

존 디어는 원래는 쟁기를 만들던 회사다. 20세기 초반엔 증기 트렉터를 개발해서 농기계 회사로 거듭났다. 21세기 초반엔 디지털 기술 기업으로 거듭나기 시작했다. 200년 굴뚝 레거시 기업이 21세기 첨단 테크놀로지 기업이 될 수 있었던 건 실리콘밸리 빅테크 기업 못지 않은 공격적인 연구개발과 인수합병 덕분이었다.

존 메이 존 디어 CEO
존 메이 존 디어 CEO

존 디어는 202125000만 달러에 베어 프래그 로보틱스라는 스타트업을 인수했다. 존 디어 로봇 트렉터에 쓰이는 자율주행 핵심 기술을 보유한 회사다. 라이트도 마찬가지다. 특히 라이트가 가진 자율주행 기술인 클래리티는 저비용 고효율이다. 도로를 주행하는 자율주행 자동차는 빠른 속도로 달리기 때문에 라이다 기술을 활용해야만 한다. 레이저를 쏴서 사물을 식별한다.

반면에 비교적 느린 존 디어 로봇 트렉터한텐 라이트처럼 카메라를 활용해도 충분하다. 게다가 내구성도 높다. 트렉터는 기본적으로 논밭 같은 비포장 지역을 주행하기 때문이다. 존 디어는 레거시 기업 답지 않게 새로운 기술 트렌드를 회사의 일부로 흡수하는데 주저함이 없었다. 사실상 농업이라는 시장과 존 디어라는 브랜드만 빼곤 다 바꾼 셈이다. 존 메이 존 디어 CEO와 제이미 하이드만 최고기술책임자는 모두 기술에 정통한 전문가다. 누구도 존 디어만큼 바꿀 수 없다.
 

자연재해 방패는 테크놀러지뿐

존 디어가 키노트 발표자로 나서는 CES 2023의 대주제는 휴먼시큐리티. 인류의 안녕과 번영이다. 역설적으로 지금처럼 인류의 안녕이 위협받고 있는 시기도 없다. 우크라이나 전쟁 같은 인재가 터진다. 호주 산불 같은 천재지변이 덮친다. 여름엔 집중호우에 겨울에 북극한파가 몰아친다. 인류가 이런 위기에 맞설 수 있는 무기는 테크놀로지 뿐이다. 존 디어의 로봇 트렉터처럼 말이다.

인류 인구는 2050년까지 80억명까지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반면에 농업 인구는 빠르게 줄어들어가고 있다. 로봇이 쟁기질 하는 시대가 하루 빨리 오지 않으면 모두가 굶어죽는 시대가 닥칠지도 모른다.

사실 존 디어 트렉터는 원래도 비싼 편이다. 별명이 트렉터계의 페라리다. 로봇 트렉터는 더 비쌀 수밖에 없다. 아무리 기술이 좋아도 비싸서 쓸 수 없으면 무용지물이다. 그래서 존 디어는 구독경제 모델을 적극 도입하고 있다. 그렇지만 존 디어는 자칫 부농의 전유물이 될 수 있다.

과적으로 미래 식량 위기는 로봇을 쓸 수 있는 나라와 그럴 수 없는 나라의 격차로 나타날 수도 있다. 로봇 트렉터를 쓸 수 있는 부농과 그렇지 못한 빈농의 격차도 커지게 된다. 결국 로봇 농사가 미래 시골의 풍경까지 바꿔버릴 변수가 되는 셈이다. 휴먼시큐러티는 로봇 사슴한테 달려 있다.

존 디어가 주도하는 로봇 농업은 전 세계 농업과 농기계 산업의 판도를 바꿀 수 있다. 농업은 인류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산업이다. 자연히 나라마다 대륙마다 대표 농기계 기업이 있다. 미국엔 존 디어와 아그코가 있다. 일본엔 구보타와 얀마가 있다. 인도엔 마힌드라가 있다. 유럽엔 CNH가 있다.

글로벌 시장 규모는 2021년 기준으로 2000억 달러 이상이다. 존 디어가 선도하는 로봇 트렉터는 결국 이들 기업의 경쟁 구도에도 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 자율주행 농업이 가능한 농기계 회사와 그렇지 못한 회사로 나뉠 수 있다. 무엇보다 중국엔 미국의 존 디어나 유럽의 CNH에 견줄만한 세계적인 대형 농기계 회사가 아직은 없다.

반면에 중국은 식량수요가 가장 큰 나라다. 로봇 트렉터의 등장은 미중경쟁과도 맞물려 있다. 이미 식량도 무기화된 지 오래됐기 때문이다. 인류는 2022년 내내 에그플레이션을 경험했다. 이런 식량 가격 폭등은 자연재해와 전쟁 같은 불가항력적인 변수 탓도 있었다. 그 이면엔 에그플레이션을 가속화시킨 건 이 틈에 식량을 무기화하려는 각국 정부가 있었다. 그 틈에 식량으로 돈벌이를 하려는 선물투기꾼들이 있었다.

시장 예측 전문기관인 아이디테크엑스에 따르면 글로벌 자율 주행 트렉터 시장 규모는 2027년까지 2398000만 달러에 달할 것으로 전망된다. 빠른 성장이다.

사실 존 디어는 늘 전쟁으로 흥했다. 1861년부터 1865년까지 4년 동안 이어진 남북전쟁은 존 디어한텐 사업적 기회였다. 노예 노동력을 북부에 빼앗긴 남부 농장들은 생산성을 유지하기 위해 존 디어의 쟁기를 사들일 수밖에 없었다.

둥근 날이라는 기술만이 존 디어가 성공한 유일한 비결은 아니었다는 얘기다. 존 디어 같은 백년 기업은 이렇게 기술과 시대가 함께 만든다. 누구도 디어만큼 달릴 수는 없다.

 

- 신기주 더 밀크 코리아 부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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