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황을 이기는 글로벌 기업 전략 ] (1) 코카콜라

지난 16일 스위스 다보스에서 개막한 세계경제포럼(WEF·다보스포럼)의 화두는 경기침체. 전 세계 분석기관과 글로벌 기업의 최고경영자들 대다수도 불황의 골이 깊어질 수 있음을 경고하고 있다. 지난 2007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가장 많은 비관론이 나오는 셈이다. 한국경제도 안전지대가 아니다. 오히려 경기불황의 진원지인 미국·중국 등의 강대국 보다 더욱 위험할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대내외 복합경제위기로 내수는 크게 위축되고 있는 데다 최근엔 믿었던 수출마저 흔들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같은 극심한 경기불황 속에서도 끊임없이 성장페달을 돌리는 글로벌 기업들이 있다. 오히려 불황을 기회 삼아 평소보다 더 빠르게 경영성과를 거두고 있는 기업들도 있다.

경기침체 때문에 사업이 잘 되는 불황형 산업이 아니라 경기침체를 극복하는 특별한 전략을 구사하는 혁신기업도 있다. <중소기업뉴스>는 실리콘밸리 창업전문매거진 더 밀크(The Miilk)’의 한국법인 부대표 신기주 칼럼니스트가 기고하는 기업인사이트코너를 통해 불황 속에서도 웃는 이들의 속살을 들여다보는 미니 연재를 시작한다. <이권진 기자>

대공황기 노동 음료로 인기

2차대전 때 세계입맛 접수


모델로 산타클로스 내세워

탄산시장 겨울철까지 확장

빨강 로고도 성공적 연착륙

코카콜라를 마시고 있는 워런 버핏
코카콜라를 마시고 있는 워런 버핏

내 몸의 4분의 1은 코카콜라로 돼 있다.” 워런 버핏의 말이다. 워런 버핏과 코카콜라의 인연은 여섯 살 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버핏은 1930년생이다. 버핏의 여섯 살은 1936년의 일인 셈이다.

당시 코카콜라는 사업적으로 1차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당시는 대공황기였다. 불황엔 코카콜라처럼 싼 음료가 잘 팔리는 법이다. 게다가 당시 루즈벨트 정부는 대공황을 극복하기 위해 뉴딜 정책을 추진했다. 뉴딜 정책의 핵심은 인프라 재건을 명분으로 하는 대규모 토건 사업이었다. 다리를 놓고 댐을 세워서 일자리를 창출했다.

싸고 달달하고 청량한 코카콜라는 공사 현장에서 노동음료로 인기가 높았다. 미국판 박카스였던 셈이다. 일찍부터 이재에 밝았던 어린 버핏도 코카콜라의 상품성을 깨달았다. 6병 들이 코카콜라 한 상자를 25센트에 도매로 샀다. 이걸 병당 5센트에 판매했다. 여섯 살 짜리가 콜라 소매 판매로 5센트의 이문을 남긴 셈이다. 워런 버핏의 첫 번째 투자였다. 대공황기 코카콜라 투자가 시작이었다.

 

단순 음료 아닌 영혼의 맛

코카콜라는 늘 불황과 함께 성장했다. 태생부터가 그랬다. 코카콜라는 1886년 미국 약사인 존 팸버턴이 발명했다. 당시는 1865년에 끝난 남북전쟁 이후 전미국토의 산업화와 도시화가 빠르게 진행되던 시기였다. 지금의 중국을 연상하면 쉽다. 바꿔 말하면 미국 인구의 대다수가 피부색에 상관없이 어딘가에서 일하는 노동자가 돼가고 있었단 말이다.

노동자들한테 필요한 건 잠깐의 휴식이었다. 이런 잠깐의 휴식을 제공한 게 소다 파운틴이라고 불리는 동네 카페였다. 당대의 스타벅스였던 셈이다. 존 팸버턴은 소다 파운틴에서 판매할 음료로 코카콜라를 개발했다. 최초의 코카콜라 광고 문구는 맛있고, 상쾌하고, 기분 좋아지고 활력을 주는이었다.

동네 소다 분수대에서 팔리던 코카콜라를 전국구 음료로 성장시킨건 2대 대주주인 아사 캔들러였다. 아사 캔들러는 1892년 나이든 존 펨버턴으로부터 지분을 매입해서 코카콜라컴퍼니를 설립했다. 2년 뒤인 1894년 보틀링 시스템을 도입했다. 코카콜라를 병입해서 대량생산하는 유통 체제를 수립했다.

B2C 소비재 시장에선 늘, 될 놈은 크게 된다. 될 놈은 처음부터 J커브를 그리면서 성장한다는 말이다. 백여년 전 코카콜라도 마찬가지였다. 소비자들이 기다리던 그 맛이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코카콜라 월드의 급팽창엔 액상과당과 백설탕 그리고 캬라멜 색소와 인산과 조금의 카페인 이외에도 경제적 불황이라는 MSG가 필요했다. 코카콜라를 전 미국인의 음료로 부상시킨 건 버핏이 콜라를 팔기 시작했던 대공황이었다. 이걸 다시 전 세계인의 음료로 확장시킨 건 제2차 세계 대전이었다. 유럽과 아시아 전선에 투입된 1020세대 미군들한테 코카콜라는 단순한 음료수가 아니었다. 어릴 적부터 마셨던 고향의 맛이었다. 미군들은 탄약은 버려도 콜라는 버리지 않았다. 콜라야말로 미군한텐 영혼의 탄약이었다.

자연히 승전국인 미국의 군인들이 즐겨 먹는 코카콜라는 유럽과 아시아 전역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 수밖에 없었다. 코카콜라는 1930년대 산타클로스를 주요 광고 인물로 등장시켰다. 대공황으로 매출이 줄자 여름음료였던 탄산시장을 겨울까지 확장시키려는 전략이었다. 빨간색 로고를 마케팅으로 본격 내세운 것도 이 무렵부터였다. 2차 대전으로 빨간맛은 세계의 맛이 됐다.

 

워런 버핏 투자는 신의 한수

1950년 시사주간지 타임은 코카콜라를 커버 스토리로 선택했다. 코카콜라가 지구한테 콜라를 먹이는 이미지였다. 소비재가 타임의 표지를 장식한 첫 번째 사례였다.

코카콜라는 1989119일 베를린 장벽 붕괴에서 새로운 기회를 포착한다. 냉전 체제의 붕괴로 러시아와 동구권 그리고 중국이 코카콜라의 새로운 시장으로 부상했다. 러시아와 중국 모두 자본주의에 발빠르게 편입되면서 새로운 경제적 위기를 겪게 됐다.

러시아는 모라토리엄을 선언했다. 동구권 국가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중국은 빠른 성장에 따른 급격한 이촌향도 현상을 겪었다. 모두가 콜라가 필요한 시간이었다. 코카콜라는 1992년 러시아에 공장을 설립했다.

여섯 살 때 처음 코카콜라를 사고 팔았던 워런 버핏이 이번엔 코카콜라 주식을 매입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버핏은 1987년 코카콜라 주식을 대량 매수했다. 마치 냉전 붕괴로 콜라 시장이 팽창할 것을 알고 있었던 것처럼 정확한 타이밍이었다.

게다가 버핏은 1987년 블랙먼데이 주가폭락 사태를 이용해서 코카콜라 주식도 폭락했을 때를 노렸다. 당시 코카콜라 주가는 2달러였다. 버핏은 18억달러를 들여서 코카콜라 주식 2400만주를 매수했다. 2023년 현재까지도 여전히 코카콜라 주식을 보유하고 있다. 2차례 주식분할을 거친 버핏의 코카콜라 지분은 4억주로 약 9.25% 정도다. 뱅가드 같은 대형 펀드보다도 앞선 1위 주주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최전선 포대까지 전달된 코카콜라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최전선 포대까지 전달된 코카콜라

코로나 판데믹 이후 버핏의 투자사인 버크셔해서웨이가 포트폴리오 비중을 조정하면서 코카콜라의 비중도 낮아졌다. 원래 4위였던 코카콜라의 자리는 에너지 기업 셰브론이 차지했다.

비록 포트폴리오 안에서 비중은 낮아졌지만 코카콜라 주식을 팔지는 않고 있다. 효자 배당주라서다. 경기 불황엔 코카콜라가 효자 투자처인 또 다른 이유다. 코카콜라의 배당률은 2.8%에서 3.2% 사이다. 현재 코카콜라 주가는 60달러 안팎이다. 1주당 2달러 정도 배당을 주는 셈이다.

이걸 버핏이 보유한 4억주에 대입하고 35년 동안의 보유 기간을 곱하면 배당 총액을 알 수 있다. 물론 단순 계산이지만 워런 버핏은 매년 7억달러씩 35년 동안 총 245억달러의 배당을 받은 셈이다. 한화로는 30조원이 넘는다. 코카콜라를 팔아서 5센트를 벌었던 소년이 코카콜라 배당금으로 평생 번 돈이다. 그렇지만 버핏은 코카콜라 경영에서 결정적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2000년 만년 콜라 2위였던 펩시와의 게토레이 인수전에서 코카콜라가 패배하게 만든 것이다. 게토레이를 생산하는 퀘이커오츠는 펩시와 코카콜라 모두 인수 의사를 가진 알짜 회사였다. 무엇보다 게토레이로 스포츠음료 시장 점유율 84%를 자랑했다.

펩시는 코카콜라보다 12년 늦은 1898년 탄생했다. 역시 미국 약사 케일럽 브래드햄이 발명했고 초반엔 소다 파운틴에서 판매됐다. 코카콜라와 달리 초반 운이 나빴다. 대공황 때 파산하고 말았다. 코카콜라한테 회사 인수를 제안했을 정도였다.

2차 대전 당시 코카콜라가 고향의 맛에서 세계인의 맛으로 팽창할 당시 펩시는 반값 할인으로 연명했다. 싼맛 콜라로 살아남았다. 그나마 과자 회사 프리토레이와 합병해서 펩시코로 거듭나면서 공격적인 마케팅을 시작했다. 코카콜라는 2차 대전에 참전한 구세대의 음료이고 펩시는 반항기 어린 신세대의 음료라는 마케팅이었다.

눈을 가리고 콜라맛을 테스트하는 유명한 펩시 블라인드 테스트 광고도 이때 나왔다. 마케팅은 효과가 있었지만 역전은 어려웠다. 그런데 이때 콜라 시장 전체에 위기가 찾아왔다. 웰빙 열풍으로 엄마들이 아이들한테 콜라를 금지하는 트렌드가 생겨난 셈이다. 이때 펩시코는 과감하게 콜라 시장을 포기하고 스포츠 음료 같은 건강 음료 시장으로 눈길을 돌렸다.

이걸 주도한 게 지금까지도 펩시코의 회장인 인드라 누이 당시 부사장이었다. 두 아이의 엄마였던 인드라 누이는 자기 자신이 웰빙 트렌드의 핵심 소비자층이었다. 콜라 말고 다른 시장에서 코카콜라를 이기는 전략을 세웠다.

반면 코카콜라는 여전히 콜라 시장에 집착했다. 압도적 1등이었던 시장을 포기하기 어려웠다. 전형적인 1등의 역설이었다. 이때 코카콜라의 콜라 집착을 주장했던 이사회 임원이 바로 워런 버핏이었다. 버핏의 반대로 코카콜라는 게토레이를 가져오는데 실패했다. 그걸 줍줍한 게 인드라 누이의 펩시코였다.

 

1초당 2만여 잔 판매

2004년 펩시코의 매출은 292억달러를 기록했다. 219억달러를 기록한 코카콜라의 매출을 넘어섰다. 콜라 시장에서 펩시의 점유율은 30% 이하로 떨어졌다. 콜라 시장에서 최강자는 여전히 코카콜라였다.

반면에 건강음료나 스낵 시장에선 펩시코가 코카콜라를 압도했다. 코카콜라는 콜라 전투에선 이겼지만 음료 전쟁에선 졌다. 결국 워런 버핏은 코카콜라 이사회에서 사임했다. 버크셔 해서웨이 주총에서 코카콜라를 달고 살만한 여전히 콜라 마니아지만 더 이상 코카콜라 경영에는 간여하지 않는다.

또 반면 펩시코는 대체육 스타트업인 비욘드미트와 제휴하고 테슬라의 전기트럭 세미의 1호 고객이 될만큼 지금도 ESG 트렌드를 주도하고 있다. 펩시코 매출은 코카콜라 매출의 2배가 넘는다.

코카콜라는 대표적인 불황형 소비 상품이다. 태생부터 지금까지 늘 불황에 잘 팔렸다. 실제로 미국 연준의 긴축으로 리세션 신호가 감지된 2022년 하반기에 오히려 코카콜라는 분기 매출이 증가하고 주당 순이익도 증가하는 경향을 보였다. 코카콜라의 2023년 전망도 나쁘지 않다.

코카콜라의 한국 소매가는 202311일을 기준으로 350밀리리터 기준 1병 당 1900원에서 2000원으로 100원 인상됐다. 매년 연초마다 코카콜라의 소매가는 조금씩 인상됐다. 사실 한국은 전세계 다른 나라와 비교해서 코카콜라 가격이 비싼 편이다. 미국보다 1.8배 비싸다. 그래도 코카콜라는 한국 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서 초당 21990잔씩 팔리고 있다. 다시 빨간 맛의 계절이다.

 

- 신기주 더 밀크 코리아 부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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