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의점주·작가
편의점주·작가

새벽에 일어나니 아내가 묻는다. “무슨 꿈을 꿨길래 잠꼬대로 휴대전화 번호를 읊어댄 거야?” 꿈에서 어디 포인트 적립이라도 했던 걸까. 팔오팔팔 팔오팔팔 하면서 휴대전화 뒷번호를 자꾸 중얼거리더란다. 그런 모습을 상상하니 우스워 홀로 빵 터졌다.

평소 습관이 꿈으로, 혹은 일상에 반사행동처럼 나타나는 경우가 있다. 편의점을 창업하고 서너 달쯤 지났을 때였다. 손님에게 신용카드를 받으면 카드 받았습니다라고 응대하는 것이 서비스 멘트였는데, 내가 손님으로 어느 술집에 갔다가 비용을 계산한 후 신용카드를 돌려받고는 나도 모르게 이렇게 말했다. “카드 받았습니다.” 술집 주인장이 웃을 수밖에. 평소 투철하지 않은 서비스 정신이 그럴 때는 어쩜 그리 충만해지는 건지.

손님이 그러는 경우도 있다. 오피스 상권에 자리 잡은 우리 편의점은 여러 회사 직장인이 손님으로 드나드는데, 그러다 보니 직업적 습관과 관련한, 짧지만 재밌는 에피소드를 종종 겪는다. 편의점을 나가면서 좋은 하루 되세요, 고객님이라고 공손히 인사해 잠시 당황하게 했던 손님이 있고, 상품을 고르는 사이 러시아어로 추정되는 언어로 계속 통화하던 손님이 봉투에 담아주세요로 추정되는 부탁까지 그 언어로 말해서 빙그레 웃었던 적이 있다. 앞 손님은 우리 편의점 건물에 있는 콜센터 업체 직원이었고, 뒷 손님은 무역회사에 근무하는 직장인이다.

나는 편의점에 올 때마다 계산대 안에 들어가고 싶은 충동을 느껴.” “너도 그래? 나도 마찬가지야.” 재밌다는 듯, 혹은 권태롭다는 듯 대화를 주고받는 손님들의 직업을 알고 보니 우리 건물에 있는 IT업체에서 신형 포스기기를 개발하는 연구원들이었고, 경비업체 근무복을 입은 어느 손님은 우리 편의점에 올 때마다 야간에 무인으로 운영할 때 도난 방지에 더욱 주의를 기울이셔야겠어요라고 마치 동생이 운영하는 편의점이라도 되는 양 다정히 걱정해준다.

자영업자로서 편의점이라는 공간은 내게 엄연한 직장이지만, 수많은 직장인들을 만나는 연결 고리이기도 하다. 우리는 누구나 어디에선가 직장인이고, 또 어디선가는 손님으로 다른 직장인을 만나며 하루를 산다. 우리는 그렇게 서로의 역할을 주고받으며 세상을 살아가는 중이고, 서로의 분신을 마주 보며 역할을 교환하는 셈이다.

얼마 전 MBN ‘진상월드라는 프로그램에 게스트로 출연했다. 속칭 진상이라는 용어로 불리는, 눈살을 찌푸리게 만드는 손님들의 천태만상을 주제로 한 프로그램이었다. 방송 끝자락에 사회자가 그런 손님을 겪을 때 어떻게 스트레스를 푸느냐고 물었다. “그냥 잊어요라고 대답했던 것 같다. 딱히 방법이 있겠는가. 잊는 것이 최상이고, 고마운 손님 99.99%에게 더욱 집중하는 것이 최고의 해결책이다. 고작 0.01%도 안 되는 사람들 때문에 99.99%에 대한 다정한 마음까지 흔들려서야 되겠는가.

역지사지(易地思之)라고 흔히 말하지만 말처럼 쉽지 않은 것이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하는 일이기도 하다. 어쩌면 우리는 그런 부단한 연습과 훈련 가운데 인생을 살아가는 것 같다.

오늘도 편의점 계산대를 지킨다. 찾아오는 손님 모두가 어디에선가는 스트레스를 받는 직장인이며, 누구에게는 소중한 엄마 아빠이고 아들딸일 것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는다. 그것만 가슴에 담아둬도 세상이 한 뼘 정도는 따뜻해질 텐데. 꿈속에서도 중얼거리는 전화번호나 서비스 멘트처럼,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 또한 일정하게 굳은 습관의 결과가 아닐까. 이왕 사는 것, 상대에게 조금 다정해지면 일단 자신부터 행복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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