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집에서 어른들의 식사법을 볼 수 있다. 짜장면에 식초와 고춧가루를 친다. 짬뽕에 식초를 치는 분도 꽤 있다. 식초는 감칠맛을 올려주고 입맛을 돋워준다. 이제 식초는 거의 치지 않지만 고춧가루 넣는 방식은 남아 있다.

얼마 전 서울에 있는 큰 시장에 갔다. 청량리시장인데 통칭해서 그렇게 부를 뿐, 실제로는 9개의 시장이 몰려 있다. 그중 흥미로운 곳이 청량리깡통시장이다. 이 시장에서는 여러 가지 깡통제품즉 값이 싼 대용량 공장제품을 판매한다. 지금은 석유화학계 용기를 많이 쓰지만 과거에는 대용량 식자재가 주로 깡통 용기 안에 담겨 있었다. 이 시장을 중심으로 새벽부터 식재료를 사러 오는 상인이 많아서 근처에 채소와 양념류를 도매로 취급하는 가게들이 꽤 많다.

말린 고추를 산처럼 쌓아놓고 팔기도 하지만 식당업자들의 요구에 맞게 특화된 제품도 판다. 조림용, 떡볶이용, 찌개용, 김치용, 마라탕용 등 용도에 따라 분류돼 있다. 고춧가루의 느낌을 한눈에 잘 살펴볼 수 있도록 투명한 유리 진열장에 넣어서 판다. 고춧가루를 고를 때 때깔, 입자의 굵기 등을 살펴보는 걸 감안한 방식이다.

뿐만 아니라, 식당업자의 기호에 맞추기 위해 블렌딩도 한다. 수많은 고춧가루를 이리저리 섞어 음식에 맞는 최적의 블렌딩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어떤 가게는 최적의 배합, 그대로 골라 쓰시면 됩니다라고 광고를 한다. 보통 식당업자는 다루는 메뉴에 따라 원가와 맛을 고려해 자체 배합을 하는데 아예 고춧가루 전문가가 배합을 해서 판다는 뜻이다.

우리나라의 밥값은 대체로 싼 편이고, 서울 동부지역은 더욱 싸다. 그래서 동부지역 식당을 주 고객층으로 하고 있는 청량리의 고춧가루 사장님들은 가격을 낮추는 여러 가지 노하우를 갖고 있다.

국산 고춧가루는 값이 비싸서 잘 쓰이지 않는다. 김치가 공짜고, 반찬 리필도 무료인 우리 관습상 제일 비싼 양념인 고춧가루를 국산제품으로 쓰기 어렵다. 이런 형편에도 국산 고춧가루를 고집하는 식당 사장님들은 정말 대단한 분들이다. 식당에는 원산지를 표기하도록 돼 있고, 김치는 더 엄격해서 배추와 고춧가루 양념을 각기 따로 표기하도록 돼 있다. 싼 밥집인데 이 모든 재료가 국산이라면 정말 그 사장님은 땅 파서 장사하는수준의 내핍과 노하우를 가진 분이라고 할 수 있다.

고추는 알려진 대로 임진왜란 무렵 한국에 들어왔다. 당시에는 주로 관상용이었다고 한다. 맹렬하게 매운 고추를 맛있다고 먹을 사람은 없었을 테니까. 대신 빨갛게 익은 고추 열매는 얼마나 예쁜가.

한국은 점차 고추 먹는 법을 알게 됐다. 대략 18세기에 들어와 크게 퍼졌다. 한글조리서인 <음식디미방>1670년경 쓰였는데, 그 책에는 고춧가루가 아예 나오지 않는다. 김치도 고춧가루가 쓰이기 전에는 주로 소금이나 간장에 절이는 방식이 선호됐다. 고춧가루를 많이 쓰게 된 것은 배추가 김치의 핵심 재료로 등장하고, 김장의 주인공이 되고나서 부터라고 한다. 옛날 우리 민족의 김장은 무가 주재료였다. 점차 통배추가 쓰이면서 잘 물러지는 배추에 고춧가루를 넉넉히 넣으면 아삭한 맛을 오래 보존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고추는 한국에서 개량되고 계속 발전했다. 국내 기후에 맞게 더 잘 견디고, 수확하기 쉽도록 크기도 커졌다. 요새는 농업 인구의 감소로 수확이 더 편하고, 고춧가루도 많이 나오는 슈퍼 신품종도 많다. 과육을 두껍게 개량해 가루가 많이 나오도록 했다.

중국집이 아니어도 옛날 식당에는 고춧가루 통이 놓여 있는 때가 많았다. 설렁탕집 같은 곳은 필수였다. 이제는 고춧가루 놓인 집을 찾기 힘들다. 과거보다 우리는 더 맵게 먹지만 순댓국집의 다지기 양념 외에는 고춧가루 자체를 탁자에 놓는 경우가 적어진 것은 흥미로운 시대상의 변화일 것이다.

- 박찬일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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