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국역이 지척인 고즈넉한 별천지
주말엔 차량통행 막아 호젓한 산책

전통주·수제맥주 한모금에 피로 싹
톡 쏘는 사워 에일은 신록만큼 청량

홍어삼합·고추장굴비에 입안 호강
거리 돌며 공방 훑어보는 재미 쏠쏠

담벼락 위로 푸른 잎이 고개를 내민 서순라길 돌담길의 풍경
담벼락 위로 푸른 잎이 고개를 내민 서순라길 돌담길의 풍경

사람들로 붐비는 종로 한복판에 시간이 멈춘 듯 고요한 동네가 있다. 옛 조선 왕조의 신줏단지를 모셔둔 종묘의 서쪽 담장일 끼고 이어진 길, 서순라길이다.

서순라길은 종묘의 서쪽 담장 일대의 길을 부르는 명칭으로 종로3가 45-4에서 권농동 26까지를 잇는 도로다. 조선시대 종묘를 순찰하던 순라청 서쪽에 위치한 길이라 해 서순라길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유서 깊은 동네임에도 잘 알려지지 않은데는 이유가 있다.

서순라길은 조선 왕조가 몰락하고 일제강점기를 거친 후 판자촌으로 전락했다. 수십 년 간 종묘사직의 돌담을 제집 담벼락 마냥 사용하던 집들을 정리한 건 1995년 즈음이다. 이때 다시금 길을 조성하긴 했으나 담장을 따라선 주차장, 공장과 사무실의 물건을 오르고 내리기 위해 주정차된 차들로 인해 볼일이 없는 사람들이 지나는 일은 드물었다.

그러던 중 2010년 이후부터 종로의 비싼 임대료를 피해 주얼리 공예가들이 하나 둘 모이기 시작했고, 2020년 서울시의 서순라길 재정비 사업으로 우리에게 이름이 들리기 시작한 게 불과 2~3년 전 일이다.

지금도 서순라길에 이어진 건물 뒷편에는 사람 한두 명이 겨우 지날 법한 좁은 길 사이사이로 조그마한 제조사들이 눈에 띈다. 좁은 골목을 빠져나와 종묘를 지키는 담벼락이 보이면 거기가 서순라길이다.

서순라길에는 돌담길을 따라 아기자기하고 개성 있는 음식점, 공방 등이 즐비하다
서순라길에는 돌담길을 따라 아기자기하고 개성 있는 음식점, 공방 등이 즐비하다

안국역과 종로3가역에서 가깝고 익선동과도 한 블록 차이밖에 나지 않지만 서순라길에 들어서는 순간 번화한 그 거리와는 완전히 다른 세계가 펼쳐진다.

종묘를 지키는 높은 담벼락과 2층 높이의 낮은 건물들이 만든 길은 서울에서는 좀체 마주하기 힘든 고즈넉한 분위기가 감돌고, 종묘 담장을 넘보지 못하도록 건물 높이가 2층으로 제한된 덕에 덕수궁 돌담길이나 북촌, 서촌 길과는 또 다른 아늑함이 느껴진다.

돌담길 옆에는 1차선 일방통행로가 있는데 평일에도 차량 통행량이 많지 않은 편인데다 주말에는 차량 통행을 금지하고 있어 호젓이 산책하기에 좋다. 부슬비 내리는 날에는 자박자박 발걸음 소리에 귀 기울이며 걷는 맛도 있다.

서순라길에 공방들이 들어서고 조금씩 정비되고 나서부터 아기자기한 레스토랑과 카페들도 많이 생겨났다. 약 1km 남짓 이어지는 길 위에는 각자 저마다의 개성으로 무장한 가게가 즐비하다. 돌담을 마주보고 있는 만큼 대다수의 가게들이 전면에 커다란 통창을 낸 것이 특징이라면 특징이다.

안이 훤히 들여다 보이는 통창 사이의 묵직한 나무 문이 시선을 끄는 ‘우리술집 다람쥐’는 국내 전통주와 퓨전 한식 요리를 선보이는 한식주점이다. ‘우리술집’답게 탁주부터 청주, 증류주 등 다양한 전통 술을 소개한다. 청량한 탄산이 매력적인 생막걸리를 탭으로 내어주는가 하면 ‘요새로제’, ‘오래된노래’ 등과 같이 현대식으로 재해석한 각종 전통주를 경험할 수 있다.

종로 주얼리타운과 가까운 서순라길에는 서울주얼리지원센터가 있다
종로 주얼리타운과 가까운 서순라길에는 서울주얼리지원센터가 있다

민물새우젓인 토하젓을 사용한 오일 파스타와 제주 당면 피순대를 노릇하게 구워 트러플 마요 소스에 찍어먹는 순대구이 등 술맛을 더 달큼하게 만들어 줄 퓨전 요리들도 재미있다. 우리술집 다람쥐에서 창덕궁 방향으로 몇 걸음 더 올라가면 ‘서울집시’가 나온다. 펑키한 내부 분위기와 고즈넉한 돌담길의 모습이 묘한 조화를 이루는 서울집시는 국내 수제 맥주 브루어리이자 브루어리에서 운영하는 펍이기도 하다.

비오는 평일 오후, 서울집시 바 테이블에 앉아 물방울 맺힌 창으로 바라본 종묘
비오는 평일 오후, 서울집시 바 테이블에 앉아 물방울 맺힌 창으로 바라본 종묘

독특하고 재미있는 스타일의 수제 맥주를 맛보러 온 사람들, 퇴근 후 시원한 맥주 한잔으로 하루의 피로를 풀고자 하는 사람들로 평일에도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조금씩 더위가 찾아드는 이 계절에는 산미가 도는 사워 에일을 마셔보자. ‘트위스트 고제’, ‘오아시스 그레이프 스킨’ 등은 5월의 신록만큼이나 청량하고 상큼한 맛을 지녔다. 여기에 고수가 듬뿍 올라간 베트남식 윙, 볼케이노 감자샐러드 등을 곁들이면 신세계가 펼쳐진다.

그렇다고 신상가게만 있는 건 아니다. 그 옛날 서순라길에 공장과 사무실이 밀집해 있을 때부터 자리를 지켜온 노포들도 있다.

서순라길 끄트머리에서 30년 가까이 영업 중인 홍어 전문점 ‘순라길’은 이 동네 터줏대감이다. 서울집시에서 율곡로 쪽으로 오르는 길에 쿰쿰한 향이 느껴진다면 거기가 곧 순라길이 있는 곳이다. 대표메뉴인 홍어삼합을 비롯해 회와 찜, 탕으로도 홍어를 맛볼 수 있다. 이곳의 홍어는 삭힘 정도가 지나치지 않아 쫄깃하고 적당히 코를 쏘는 것이 특징. 청량감이 느껴질 만큼 시원하고 아삭한 김치도 제 역할을 톡톡히 한다. 고추장굴비와 낙지볶음 등 홍어를 먹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한 메뉴도 준비돼 있다.

커다란 통창으로 모던하면서도 아늑한 분위기가 새어나오는 우리술집 다람쥐
커다란 통창으로 모던하면서도 아늑한 분위기가 새어나오는 우리술집 다람쥐

종로 주얼리타운를 기준으로 서순라길이 시작되는 길 초입 부근에 위치한 ‘종묘해장국’은 어르신들의 막걸리 ‘핫플’이다. 라면, 도토리묵, 파전 등의 안주를 시키면 파전, 열무김치, 감자볶음, 나물 등의 각종 찬을 내어준다. 푸짐한 손맛과 뉴트로 감성에 최근에는 노천 테이블에 삼삼오오 모여 앉아 막걸리 잔을 부딪히는 젊은 손님들이 많다.

바깥과는 상반되는 펑키한 분위기가 묘한 매력을 풍기는 서울집시
바깥과는 상반되는 펑키한 분위기가 묘한 매력을 풍기는 서울집시

거리를 걸으며 공방을 둘러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작은 보석 공방들이 곳곳에 자리한 서순라길에서도 스페이스42는 신진 주얼리 디자이너와 브랜드가 올바른 방향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다양한 인프라를 제공하는, 그러니까 인큐베이터와 같은 역할을 하는 곳이다.

지하 1층과 지하 2층은 작가들을 위한 공간으로 오피스 공간과 제품 촬영을 할 수 있는 포토 스튜디오, 시제품 제작소 및 공동 작업실 등이 있다. 1층은 주얼리 쇼룸으로 쓰이는데 신진 디자이너가 중심이 되는 다양한 주얼리 기획전이 열린다. 창의적이고 감각적인 주얼리 제품을 한눈에 볼 수 있을 뿐더러 판매도 이뤄지기 때문에 구경하는 재미가 있다. 2층에서는 기간마다 각종 원데이 클래스가 열린다. 원석이나 진주 등의 재료를 활용한 수업부터 보석을 넣은 비누 만들기 등 주얼리와 관련된 클래스들이다. 원데이 클래스의 경우 사전 예약이 필수다. 종로교육포털 홈페이지(lle.jongno.go.kr)에서 수업과 관련한 정보를 확인할 수 있다. 

- 신다솜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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