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판 양식활어 상당량 日서 수입
장마철 비수기 겹쳐 줄도산 눈앞
‘대중화된 바다회’ 해법은 어디에

요리사, 식당주인들의 호소가 요즘 가슴 아프다. ‘단군 이래 최대 불경기’라는 말을 넘어 ‘창세기 이후 최대 불경기’라고 자조적으로 말한다. 장사라는 게 잘 될 때도 있고 안 될 때도 있다. 흐름이 나쁜 운을 만나면 ‘안되는 집은 망하고, 잘 되던 집은 연명한다’는 말이 있다.

먹는 장사도 사업이니 세상의 어떤 기업이든 비슷한 조건일 것이다. 일본의 오염수 방류 문제로 인해 아직 방류 전인데도 수산물 시장이 꽁꽁 얼어붙었다. 심리적 위협이 무척 크다. 실제 방류가 일어날 때의 일은 상상하기도 어렵다.

횟집은 예전부터 장마철이 불경기다. 비올 때는 회 안 먹는다는 속설이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여름은 원래 겨울보다 어획량과 생선의 맛이 떨어지는 계절이다. 1990년대부터 양식 활어회가 횟집의 중심이 되면서 이런 분위기는 희석됐지만 여전히 작동하는 흐름이다. 그래서 ‘쉬어갈 수’ 있는 여유도 있었다. 그러나 이런 와중에 방출수 문제가 터지자 횟집은 줄도산을 앞두고 있다.

회는 오랜 우리의 식문화다. 패총은 조개무지라고 하는데, 조개만 있는 게 아니다. 생선의 뼈도 발견된다. 아주 큰 생선, 그러니까 상어류의 흔적도 보인다. 그런 큰 어종은 어로행위로 잡아먹었다기보다 아마도 해변에 쓸려온 것을 먹었을 경우가 더 흔할 것이다. 불을 다루는 시기였으니까 구워먹기도 했지만 날로 먹는 문화가 더 비중이 컸다.

우리 선조들은 일찍이 회 맛을 알았던 것이다. 현대에 와서 한국인들은 바닷고기를 회로 즐겨먹는데, 실은 이것이 극히 현대적인 현상하다. 1980년대 이전만 해도 바다를 접한 지역을 빼면, 서울 같은 곳은 회 소비량이 아주 적었다. 조선시대에는 쏘가리회를 최고로 치는 여러 시와 글이 있을 만큼 민물고기 회도 꽤 먹었고, 육회 소비량도 있었다.

물론 바닷고기도 먹었는데 지금과 같은 횟집 문화, 회 소비량을 생각하면 오산이다. 1980년대에 회를 대중화시킨 것은 민물고기 양식이었다. 이스라엘잉어(향어)의 내수면 양식에 성공해, 싸게 회를 공급할 수 있게 됐다. 발전기와 산소발생기를 쓰는 이른바 활어차(속칭 물차)가 출현하면서 오래 버티는 붕장어 같은 바다 활어가 도시로 나오기도 했다. 광어와 우럭 양식의 대중화, 수송수단의 발달, 도시 소득 증가로 인한 미식 문화의 확산, ‘맛집’의 등장, 도시 집중 등으로 회 문화가 커지기 시작했다. 1990년대의 일이다.

조선시대에도 회를 먹었을까. 물론이다. 바닷가에서는 흔한 일이었다. 그렇다면 서울은? 물론이다. 물론 아주 적었고 육회를 더 많이 먹었다. 바다 생선회는 수송수단의 문제, 회 문화의 차이로 그다지 선호되지 않았다.

조선시대 왕궁 음식의 조달을 책임지던 관청이 사옹원(司饔院)이다. 가운데 옹 자가 항아리, 즉 양념과 음식의 원료를 뜻한다. 사옹원은 주로 바닷고기는 소금치고 말리거나 젓갈로 진상받았고, 민물고기는 회로 쓰기 위해 직접 임진강과 한강 하구에 분원을 설치하기도 했다.

한마디로 고기와 횟감을 얻기 위해 현장사무소를 냈다는 뜻이다. 봄에 올라오는 황복, 여름의 준치를 얻기 위해서다. 요즘 거의 잡히지 않는 준치회를 최고로 치는 미식가들이 있는데, 과거의 유산이라고 할 수 있다.

생선회는 이미 우리 삶에 깊게 들어와 있다. 회조차 불안해서 먹기 어렵다면 이것이 누구의 문제인가. 사람들은 잘 모르지만, 시중에서 팔리는 양식 활어의 상당량이 일본에서 수입된다. 생선회 한 점 먹기 어려운 세상이 되다니.

 

박찬일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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