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천 주변서 공구상가 급성장
외제에 손색없는 국산공구 생산
1970~80년대 경제개발 견인차

만약에 이 세상에 공구(工具, Tool)가 없었다면 어땠을까? 그래도 전 세계에 대한민국이 자랑하는 반도체, 자동차, 조선 등을 비롯해 첨단산업과 중공업 분야에서 획기적인 제품을 내놓을 수 있었을까? 세계 최고의 소프트웨어 자산을 자랑하는 미국은 기술을 현실화할 수 있었을까? 분명한 답은 “불가능하다”라는 것이다.

무엇을 만들든 원재료와 사람만으로는 제품으로 실현할 수가 없다. 제품이 생기려면 반드시 도구가 있어야만 가능하다. 조그만 드라이버 하나가 없으면 그 하찮은 나사못조차도 풀거나 조일 수가 없다.

그렇다면 흔히 말하는 연장과 공구의 차이는 무엇일까? 사전적으로 연장은 ‘어떤 일을 하는 데 사용하는 도구’이고, 공구는 ‘물건을 만들거나 고치는 데 쓰는 기구나 도구’를 통칭한다고 하니, 공구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전문성을 갖춘 도구라는 구체성을 지닌다.

인류가 최초로 사용한 공구는 돌도끼로 알려져 있다. 석기시대 사람들은 현무암이나 안산암처럼 단단한 돌을 활용해 돌도끼를 만들었다. 돌도끼는 후에 청동, 철, 합금철 등으로 발전했지만, 그 용도는 변하지 않았다. 엄밀히 말해, 돌도끼는 공구보다 연장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도구, 연장 또는 공구의 발명은 역사학자들에 의해 ‘인류의 상징’으로 불리기도 한다. 왜냐하면, 도구는 동물과 인간 사이를 가늠하는 가장 큰 차이라고 해석되기 때문이다.

익히 알 듯, 지금의 대한민국 산업의 발전은 공업이 밑바탕이 됐고, 그 공업의 시작은 공구와 함께한다. 그렇다면, 우리의 공구 산업은 어떻게 발전해 왔을까? 1960년까지만 해도 주로 목공구, 농공구, 작업공구 등과 단순한 선반, 연삭숫돌, 커터 등을 생산했다. 그러면서 1970년대에는 자동차 산업의 활성화와 함께 절삭용 기계 공구의 생산이 본격화됐고, 이어 1980년대에는 다양한 산업의 발전과 함께 공구 산업도 내구성과 정밀도 면에서 외국 공구들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비약적인 발전을 이룩했다.

또한 절삭공구는 물론 에어공구, 초경공구, 유압공구, 측정공구, 전동공구 등 다양한 분야에서 자체 생산이 가능해졌다.

그렇다면, 우리의 공구 시장은 어떻게 생겨났을까? 공구 시장을 언급할 때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곳이 청계천이다. 지금은 재개발로 인해 그 규모가 현저히 축소됐지만, 청계천 공구상가는 질곡 많은 현대사가 제대로 투영된 곳이기도 하다. 해방 공간에서 일제가 남겨놓은 공장과 미군부대 등에서 다양한 부품들이 흘러나왔고, 이들이 청계천 노점상을 통해 유통되면서 공구상가가 형성됐다고 알려진다.

한국전쟁 이후 전후 복구 과정에서 다양한 상품들이 청계천에서 거래되면서 시장이 활성화됐다.

이후 공구상가들은 청계천 주변에서 급속하게 성장했고, 1970년대에는 경제개발로 많은 공장이 생겨나면서 기계 부품과 공구에 대한 수요도 증가해 국내 공구 시장을 주도하게 됐다. 하지만, 이후 1980년대에는 정부 정책에 따라 구로와 시흥 등지로 집단 이전해야만 했다. 이런 추세는 아직도 이어져 현재는 대단위 기계공구 유통단지 형태로 근교에 집중되고 있다.

필자의 회사도 필자의 아버지가 1968년 청계천의 3평짜리 가게에서 시작했고, 근 55년 동안 공구 외길을 걸어왔다. 그래서 그런지 나는 공구상이 천직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이 일이 재밌다. 일에 재미를 느끼면 어떤 어려움이든 이길 수 있다고 믿는다. 지금까지 그래 왔듯이 나 또한 앞으로도 공구상을 후대에 이어가게 하고 싶은 마음이 절실하다.

 

 

송치영
한국산업용재협회 회장⋅㈜프로툴 대표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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