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한말까지는 장작이 유일한 땔감
연탄 보급…가스중독사고 연례행사
천연가스 이어 전기취사가 대세로

최근 독립문 근처 영천시장에 다녀왔다. 요즘엔 꽈배기, 옛날식 떡볶이로 유명한 이 시장은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떡과 국밥이 명물이었다고 한다. 무악재를 넘어 북쪽으로 가는 여행객들이 이 시장에서 국밥으로 요기도 하고 떡을 사기도 했었다. 떡은 부피가 작고 열량이 높아 여행용 식량으로 최적이다. 내가 어릴 때만 해도 친척댁에 가면 돌아올 때 떡을 싸주던 관습이 있었다. 잔치를 마치고 반드시 들려 보내는 것이 떡이기도 했다.

조선시대에 영천시장을 지나가던 이들 중에는 역관들도 있었다. 조선 후기에는 중국과 무역을 해서 재산을 불린 상인이 많았는데 그들 중 다수는 집안에 역관이 있었다고 한다. 역관(譯官)은 문자 그대로 통역이다. 중국으로 가는 사신 일행의 필수 요원이다. 우리나라 특산품인 인삼을 가지고 가서 중국에서 약재, 비단 등으로 바꿔오면 비싸게 팔 수 있었다.

구한말 영천시장 근처의 사진을 인터넷에서도 볼 수 있는데 아마도 외국인이 찍었을 듯하다. 삿갓을 쓰고 소달구지를 모는 나무꾼의 모습이다. 달구지에는 산더미 같은 장작이 쌓여 있다. 뒤로는 독립문과 멀리 무악재 고개가 보인다. 지금은 자동차도로로 확장됐지만 예전에는 높고 좁은 고갯길이었다.

그 당시에 장작은 수도 한양에서 엄청난 양이 소비됐다. 시전(柴廛)이 도성 곳곳에서 열렸다. 종로 일대, 동대문, 남쪽의 숭례문, 서대문, 독립문 일대가 모두 시전이 열리는 주요 장소였다. 시(柴)란 장작을 뜻한다.

왕궁에도 많은 양의 장작이 들어갔다. 장작으로 도성의 거주민들이 난방도 하고 음식도 만들었다. 장작은 부피 대비 열효율이 낮다. 연탄, 가스, 기름에 비해서 그렇다. 수도인 한양에서 쓰는 양이 어마어마했다. 문제는 도성 근처의 산에서 무한정 장작을 공급할 수 없었다는 점이다. 연료를 오직 산에 의존하던 것이 당시 상황이었다. 민둥산이 대부분이었고, 헐벗었다. 도성에서 더 먼 삼림 지역에서 나무꾼들이 벌채해서 도성으로 가지고 왔다. 무악재 너머라면 파주, 연천까지 장작 공급지가 확장됐다. 동대문 쪽은 멀리 가평, 양평에서 장작을 실어 왔다. 농담으로 “나무꾼 얼굴만 보면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있다. 파주에서 온 나무꾼은 뜨는 해를 바라보며 오기 때문에 얼굴이 검고, 양평에서 오는 사람은 목덜미가 까맣다”는 말이 있었다.

연탄이 보급되면서 장작은 도성에서 밀려났다. 열효율이 좋았기 때문이다. 연탄 3장이면 한겨울에도 방 하나는 충분히 난방하고 취사도 했다. 단칸방에 살던 내 어린 시절의 기억이다. 방이 두 개인 집은 보통 연탄 5, 6장이 들어갔다. 연탄은 효율이 좋았지만, 가스 때문에 많은 인명이 고통받기도 했다.

나도 연탄가스를 맡고 두통과 구토에 시달리기도 했다. 연탄은 아궁이를 벗어나 보일러가 됐다. 연탄보일러의 보급으로 가스중독의 위험에서 해방될 수 있었고, 취사를 할 수 있는 기름풍로, 천연가스 레인지의 등장으로 난방과 취사가 이분화됐다.

요즘은 도시가스, 프로판가스 등 천연가스 대신 전기로 취사를 하는 집이 많아졌다. 인덕션이라고 불리는 전기 취사도구의 비중이 커지고 있다.

석탄, 연탄, 기름, 천연가스를 넘어서 전기까지 변하고 있는 연료의 변천사를 내가 다 겪고 있다고 생각하니 나이가 꽤 든 모양이다. 아, 시골 할머니 댁에서는 숯을 요리에 쓰기도 했는데, 방에 숯 화로를 들여놓고 찌개도 끓이고 떡도 굽던 기억이 난다. 시대의 변화가 참 빠르다.

 

박찬일
칼럼니스트

저작권자 © 중소기업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